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세곡 Nov 24. 2023

나는 비행기를 놓쳤을까? - 하

100일의 글쓰기 - 80번째

일본에 가면 제일 먹고 싶은 건 라멘이었다. 흔히 먹는 인스턴트 라면 말고, 일본식 라멘. 물론, 우리나라에도 라멘을 파는 곳이 많지만, 흉내 낼 수 없는 본토의 맛을 경험하고 싶었다. 라멘 위에 올려주는 차슈는 씹지 않아도 정말로 입안에서 녹아내리는지, 방금 데쳐낸 생면은 얼마큼 쫄깃할지, 걸쭉한 국물은 얼마나 깊은 풍미로 혀를 휘감아대는지 말이다. 




  “선생님! 선생님!! 여권 빨리 보여주셔야 돼요. 뒤에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아차,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여권이나 빨리 꺼낼 것이지 라멘 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아침을 걸렀더니 공복이 뇌를 지배 중인가 보다. 그나저나 여권이 손에 잡힐 타이밍이 한참 지났는데 여전히 캐리어 앞주머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여권이 없다. 없다고?? 그럴 리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캐리어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캐리어를 넘어뜨린 뒤,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어느 곳에도 여권은 없다.


  싸늘하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진다. 이러다 공항 민폐남으로 전국구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 안 되겠다. 일단 뒤쪽으로 물러섰다. 


  다시 한번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여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차분히 기억을 복기해 본다. 나는 분명 아침에 책상 서랍을 열어 여권을 챙겼었다.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챙긴 건 분명한데, 어디서 잃어버린 것일까? 혹시 차에 놓고 내렸나? 캐리어를 맡겨 놓고 얼른 주차장에 가봐야겠다. 차키를 챙겨야지 하는 바로 그 순간. 나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가로지르는 크로스백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캐리어 말고도 작은 가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안에는 차키와 지갑 그리고 여권이 평화롭게 담겨 있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중요한 물건들만 따로 가방에 담아 놓고는 정작 그 가방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개X#$%&#!!! 육두문자가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십년감수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본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여권을 두 손으로 꼭 쥐고서 다시 체크인하는 곳으로 갔다. 나를 맞이하는 직원 앞에 서서 보란 듯이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활짝 펼쳐진 여권 사이로, 웬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바로 아내의 여권이었다. 하필 내 여권과 아내의 여권은 같은 서랍 안에 포개져 있었고, 나는 무심결에 위에 있는 것이 내 것이려니 하고, 집어 들었던 거다. 


  아내의 여권을 사이에 두고, 안내직원과 나는 어색함에 침묵했다. 임시 여권 발급도 시간이 한참 걸린단다. 그렇게 나는 예약한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아내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택시 타고 날아온 아내에게 내 여권을 건네받아 미친 듯이 뛰어 다음 비행기를 잡아탈 수 있었다. 아내가 쓴 왕복 택시비가 20만 원이었다. 


  무슨 택시비가 비행기값이 나왔다. 진짜 날아왔나 보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아내를 집에 내려주고 오늘은 영업종료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다. 나 말고 택시 기사 아저씨가.




*사진출처: Photo by yousef alfuhigi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비행기를 놓쳤을까? - 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