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글쓰기 - 89번째
석촌호수 근쳐에 유명한 김치찌개 전문점이 있다. 예전에 강동구에 살았던 나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때마다 그곳에 가곤 했었다. 완전 푹 익은 묵은지로 찌개를 끓여주는데 처음에는 너무 시기만 해서 이게 뭔 맛인가 싶다. 하지만, 계속 먹다 보면 묵은지 특유의 구수함과 국물의 시원함에 매료된다.
묵은지를 활용한 음식들 중 최근까지도 맛있게 먹었던 또 다른 음식은 묵은지 참치 김밥이다. 숙대 근처에 있는 김밥집에서 파는 것으로 TV에도 맛집으로 몇 번 소개되었던 곳이다. 겉보기에는 크기가 좀 큰 것 말고는 달라 보이는 게 없었는데 묵은지 하나 들어갔다고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묵은지와 신김치의 차이를 모르고 살았다. 김치가 신맛이 나면 그게 신김치고, 거기서 오랜 시간 동안 더 푹 놔두면 저절로 묵은지가 되는 줄 알았다. 아니면, 먹었을 때 맛없으면 그냥 신김치, 겁나 맛있으면 묵은지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신김치는 말 그대로 쉬어버린 김치다. 담근 지 얼마 안 된 김치가 맞지 않는 온도 때문에 갑자기 익었든, 냉장고에서 천천히 익었든 적당한 시간이 흘러서 신맛이 나는 김치가 신김치라고 한다. 특별히 신김치를 만들기 위한 방법 같은 것은 없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묵은지는 작정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관련 블로그들을 통해서 묵은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일반 김치에 비해 양념과 젓갈의 양을 줄이고, 염분은 늘려서 담그면 신맛은 덜하고 시원한 묵은지가 된다는 것이다. 소위 묵은지 전문점에서는 이런 식으로 묵은지용 김치를 따로 담근다고 했다.
요즘에야 김치냉장고 성능이 좋아서 일반 가정집에서도 묵은지 맛을 볼 수 있기는 하다. 김치 냉장고에 넣어둔 작년 김장김치를 올해 꺼내 먹어보면 분명 묵은지처럼 맛이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전문점에서 제대로 만드느냐 집에서 작년 김치를 꺼내 먹느냐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보냈는가일 것이다.
묵은지가 되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을 저온 숙성해야 한다. 당장 버무려서 먹는 겉절이와는 다르게 긴 시간을 익히고 묵혀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임금님이 먹든 내가 먹든 공평하게 반년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요즘 같이 스피드가 생명인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진정한 슬로 푸드다.
그런 면에서 사람도 김치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이 빨리 되기를 바란다. 겉절이 담가서 먹듯 후딱 해치우고, 좋은 결과를 얻기 원한다. 조급함과 속도 경쟁, 빨리빨리 문화에 치여 살아간다. 하지만, 인생은 반대일 때가 훨씬 많다.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야만 다다를 수 있고, 상상 이상으로 인내하고 버텨야만 이룰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은 묵은지를 만드는 과정과도 같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기다려야 한다. 맛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김치나 인생이나 고단한 것은 마찬가지다. 숙성과 성숙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김치가 묵은지로 익어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 역시 한 인간으로서 멋지게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감내해야만 한다.
당장에 맛볼 수는 없을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별 볼 일 없는 인생 같다고 탄식할 필요도 없다. 저마다 고유의 맛이 들어가고 있는 것일 테니. 지금 우리는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푹 맛있게 숙성되고 있다.
*사진출처: Photo by Photos of Kore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