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넌!
몇 달 전 인사 관리자가 바뀌었다. 새 관리자는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야심 차게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우리의 의견을 듣고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개선해주겠다고 했다.
설문지 파일을 열어본 주변 직원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마치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읽어본 모두에게 행운을 선물해 주지만, 4일 안에 7통을 써서 보내지 않으면 7일 안에 천국행 KTX 탄다는 행운의 편지라도 펼쳐본 것 마냥 당황스러운 표정들이다.
도대체 왜 그런가 싶어 파일을 열고 첫 번째 문항을 읽어내려갔다. 직원들 안에 있던 인간적 고뇌와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마치 저 깊은 바닷속 어딘가에서 방금 퍼 올린 해양심층수 같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우리 회사 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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롸...?????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 느낌의 상황이거나 다소 충격적인 순간을 경험했을 때 많이 쓰는 말 - 나무 위키)
순간 멍해졌지만, 모름지기 직장생활은 기세가 중요하다. 여기서 기가 꺾이면 끝이다. 모든 문제는 출제자의 의도가 있는 법.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설문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두 번째 문항을 읽어보았다. 직원들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적어 보란다. 이쯤 되니 느낌이 쎄하다. 설문지 너머 곱지 않은 시선이 싸늘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단순히 직원들의 처우를 개선해주기 위해서 작성된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직원들을 위해 뭐라도 해줄 것처럼 포장했지만, 결국 우리를 향해 무언가를 더 '압박'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인해 감축된 인원의 몫까지 하느라 힘든데 뭘 더 바라는 건지. 관리직들이 보기에는 직원들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원하는 것을 그냥 대놓고 말씀하시지 뭣 하러 거창하게 설문조사까지 하는지 이해도 되지 않고 짜증이 났다. 그런데 내 마음과는 달리 손가락은 제 멋대로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젠장, 역시 나란 사람 쓰는 데 진심인가 보다.
뜬금없이 직원들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그들의 정체가 더 궁금했지만, 직장에는 가지고 오지 않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작성했다. 글을 마치고 보니 달랑 3문항 짜리였던 설문지가 상하좌우 최소 여백에 10포인트로 꽉 채운 3페이지짜리 리포트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브런치 메인에 오를 상이다.
해치워야 할 일도 많은데 이제 이런 압박은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냥 곱게 넣어두시라. 자꾸 이렇게 '압박'하면 더 무서운 '스크롤의 압박'으로 또다시 맞설 것이다.
*사진출처
Photo by Elisa Ventu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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