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후기

by 두루

작년, 그러니까 2021년도에는 안 해본 걸 많이 했다.


진작 해봤으면 좋았을 일들이 있다. 뭐, 해서 좋으면 언제나 하는 말이긴 하다. 이 좋은 것, 진작 할 걸 그랬어. 이런 것 안 하고 뭐했나 몰라.


사는 게 심심해 기절할 지경에 이르니 비로소 이것저것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 좋은 것들을 뒤늦게서야 접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우선 러닝.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다가, 매월 100킬로 달리기로 목표를 세웠다. 11월까지 계속했으니 재작년 12월부터 꼬박 11개월을 했다. 달성할 게 없는 일상에서 달성할 유일한 일이 새벽 달리기였다. 물론 해야 할 것들은 늘 있었지만, 내 일상에 가치 있는 목표는 달리기가 유일했다. 주말에는 12킬로 정도를 천천히 달리고 나면, 데이트를 한 것도 아닌데도 매주 되게 신나는 일들을 하고 난 기분이 되었다.


작년 4월부턴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친구와 가볍게 시작한 테니스였다. 일요일 아침 7시에 레슨을 받고 나선 서울의 이름난 공원들을 돌아다니며 걷고 뛰고 했다. 한강, 사당 현충원, 용산 가족공원, 효창공원 이런 데이트 성지를 둘이서 잘도 돌아다녔다. 서울을 가장 한산하고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대는 일요일 오전인 것 같다. 작년엔 냉면도 되게 일찍 개시했다. 이렇게 일요일 아침에 뭐라도 한다는 느낌으로 레슨을 받았을 뿐인데, 하다 보니 계속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레슨비 본전 생각에 계속하고, 계속하다 보니 테니스가 더 재밌어졌다. 아직도 테린이지만 꾸준히 같이 할 수 있는 동호회를 찾는 중이다.


작년 2월쯤엔 내 차도 생겼다. 코로나 시절 할 건 없고, 엄마 등살에 엄마 차로 겨우 겨우 운전연습만 하던 터였다. 오빠가 새 차를 사면서 타던 차를 내게 물려주었고,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작년엔 코로나 때문에 8시 통금이 생겨 10시만 되면 도로는 한적했다. 여름밤에 한창 다니던 남양주 미음나루는 지금도 가끔 간다. 지금은 통행량이 꽤 된다.


선도 본격적으로 봤다. 작년, 유난히 무더웠던 그 여름에 나는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선이 아니라면 친하게 지냈을지도 모르는, 아니면 평생 볼 일도 없을 그 남자들을 만났다. 이 경험이 내게 어떻게 소화될런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굳이 '실패'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레코드만 더 축적된 기분이다.


아, 이번에도 아니네 라는 허탈한 기분은, 한 두 번만 느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게 한 열 번, 스무 번이 되다 보면 이번에도 아닌 게 디폴트 값이 된다. 이번에도 아닌 게 디폴트 값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내게 발생하는 모든 인연에 대해 은연중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타인을 대할 때 심신에 기름을 잔뜩 두르는 것 같다. 되도록이면 나를 미끄러져 지나가도록. 유령처럼 너희들 사이를 아무런 자국 없이 스쳐 지나가도록, 나는 그렇게 군다. 잔향 없이 쉽게 커피 한 잔, 밥 한 끼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니,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나. 나나 상대방이나 허탈할 것은 매한가지 일 것이다.


점도 여러 번 봤다. 사실 점쟁이 이야기를 하려다가 주절주절 쓰다 보니, 일기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다. 사주를 장난 삼아 본 적은 있지만 그 사주풀이라는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작년엔 사주도, 신점이라는 것도 봤다. 다섯 번 정도 봤나. 별 이야기도 없었다. 뭐 언제 이직한다, 언제 결혼한다 이런 이야기들인데, 아니면 말고 식의 점괘일 뿐이다. 그런데 그가 내뱉은 말 때문에, 내 현재를 그의 세치 혀의 프레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직해도 똑같을 거라는 말 말이다.


작년 1월부터 3월까진 심리상담도 받아봤다. 자신감 없고 주눅 든 마음을 회복하고 싶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후기를 꼭 쓰고 싶었는데, 그때를 놓치니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 결론적으로 우울하거나 상담이 필요하면 적시에 찾아가면 좋다. 하지만 약간만 우울해서 가는 것은 비추다. 심리상담사에게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괴로운 사람들이다. 나 역시 그런 심각한 증세로 대우받게 된다. 사실은 그렇게 괴롭지 않은데도 이야기하다 보면 뭔가 내 기분을 과장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랬다. 30대 초반에 갔어야 했어, 그때 갔으면 좋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고, 일상의 무기력함이나 우울감은 심리상담보다 러닝을 하면서 딱 해소가 되었다. 역시 인간은 몸을 써야 한다.


작년엔 피부과 플렉스도 했다. 원래 필요한 관리는 받는 편이지만, 백 단위로 플렉스를 하진 않는데, 작년엔 했다, 것도 두 차례나. 이것저것 안 사본 걸 많이 샀다. 비싼 백이나 코트, 미용실 이런 것에 돈을 충분히 썼다. 이제는, 서른 후반은, 그렇게 해야 하는 나이인 것 같았다.


평생 성경과 기독교 주위에 맴돌던 내가 법문을 즐겨 듣게 되었다. 우연히 읽은 책에 마음이 많이 가서 그 후로 관련 내용을 더 찾다 보니 법문에 닿게 되었다.


작년엔, 내 30대에서 흔치 않게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먼지들 덕분이다. 그웬 덕분이다. 테니스 덕분이다. 난 사람들과 노는 게 좋은데,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다. 그나마 이전 회사에서는 친한 동료들이 좀 있었는데, 여기 회사에선 뭔가 친하게 굴면 쟤 왜 오버야 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더 외로워지고 말았다. 나같이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하는가 모르겠다.


작년엔, 그리고 이직을 했다. 30대에 이어 40대까지 보내게 될 것만 같았던 그곳을 드디어 탈출했고,

지금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불만의 질량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내 나이 37. 이것저것 많이 했구나. 카드값이 재작년에 비해 2배가 나와서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럴만했다. 열심히 쓰고 다닌 덕분에 세금 환급을 70만 원이나 더 받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매년 새로운 걸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해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를 도전한 해도 있었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시험 준비를 한 해도 있었다. 장기하는 가만있으면 되는데 뭘 자꾸 하려고 그러냐는 신곡을 냈다. 뭔가 일침인가? 싶지만, 본인도 가만있으면 되는데 영감을 받고 곡을 쓰고 TV에도 나오는 것처럼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있다가 한 번씩 뭘 자꾸 한다.


내 인생의 시간은 매우 많다. 시간이 너무나 남고도 남아 돌아서, 마음껏 가만히 있어도 되고, 가만히 있다가 뭘 할 마음이 생기면 마음껏 뭘 하면 된다.


돌아보면 내가 어떤 업무를 했는지, 얼마의 월급을 받았는지, 어떤 성과를 이뤘는지에 대해선 잘 회상하지 않는다. 그렇게 중요하게 성취할 업무가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로 보내는데도 일보다는 짬을 내어 행한 그 외의 것들만을 기억에 새긴다는 게 내겐 좀 중요한 포인트다.


언제 뭘 해보자는 '계획'은 삼십 대가 돼서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정말로 단 하나도 없다는 경험을 수없이 하면서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피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냥 살다 보니 하고, 뒤돌아보니 그렇게 됐더라의 방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올해에는 그래도, 테니스를 더 본격적으로 쳐보고 싶고, 이렇게 자주 글을 쓰고 싶다. 계획한 적은 없지만 그냥 이런 게 지금 마음에 들어왔다.

올해를 보내고 나서 쓰는 작년 후기는 무엇일지.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인 데다가 심심하고 무료해서 기절할 지경인데도,

그래도 뭔가 기대가 된다. 심심할 시간도 충분하고 또 뭘 할 시간도 너무나 충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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