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엔 달려야 할 일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고, 주기적으로 체력장 같은 것을 치르고, 운동장 몇 바퀴 뛰는 벌을 받기도 했다. 억지로 달리고 나서 상쾌한 기분을 느낀 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때 내 기억 속엔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기분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학창 시절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것, 애들이 다 하는 것은 쿨하지 않다고 느꼈던 반항아였다. 체육 시간엔 동종의 반항아 친구들과 그늘 밑에 숨어서 열심히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친구들을 비웃는 것이 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쿨하기 위해선 하지 않아야 할 게 많았기에 내 기호를 매우 뒤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서른세 살 이전에는 한 번도 제대로 달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달리기를 제대로 하게 된 건, 체력시험 준비를 하면서였다. 체력시험 학원(뭐 이런 것도 있더라)에 등록해 각 잡고 달리는 방법을 배웠다. 결과적으로 체력시험은 통과했지만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는데, 오히려 내게 오래 남게 된 건 그때 열심히 준비하던 달리기 경험. (그 채용 전형은 달리기를 위한 시절 인연이었나 싶을 정도다.)
사실 나도 달리기를 해볼까 싶었던 건 그보다 훨씬 전이다. 어느 날 지인에게 내가 대뜸 요가를 같이 하자고 했다. 그 사람이랑 꾸준히 반복적으로 보고 싶었다. 그는 요가는 싫다면서, 본인은 달리기를 한다고 했다. 어린이대공원을 뛴다고 했다. 내게는 인간이 하는 행동 중 고통 지수 끝판왕쯤에 있는 달리기를 매일 한다는 그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코로나가 절정에 달한 시점에 재택을 두 달이나 지속하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늘 다니던 요가원도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한 번씩, 두 번씩 공원에 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는 그를 동경했던 기억도, 열심히 체력시험 준비를 했던 경험도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한 두어 번 달리고 나니 그 기억들이 되살아 났다.
한 번, 두 번 뛰다 걷다 하던 것이, 세 번, 네 번 뛰는 것이 되었고, 그러다 각 잡고 매일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만사 집중할 게 없던 날들이었다. 꾸준히 할 도전거리가 필요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고, 아무것도 달성할 게 없는 무료한 생활에서 아침 달리기는 내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과제였다. 눈이 펑펑 오는 새벽이었고, 가로등 켜진 컴컴한 눈 쌓인 공원을 달렸다. 아침 달리기의 첫날이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달렸다. 물론 매일은 아니다. 한 달에 100킬로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주로 아침에 뛰었지만 주말에는 더 많이 뛰고, 나중에는 걷다 뛰다를 섞어하기도 했다.
달리기를 하니 생활이 건강해졌다. 의욕이 생겼다. 아마 달리기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 오늘날까지도 무료하게 지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달리기를 하고 오면, 여전히 아무런 약속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뭔가 되게 재미있는 일상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체력이 부쩍 좋아졌다. 러닝으로 기초체력을 다지고 나니, 테니스로 진입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던 것 같다. 러닝만 하다 보니 몸에 근육이 다 빠지는 것 같아 근력운동도 시작했다.
우울하고 힘이 없을 때는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밖에 나가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세상 막막한 일상은 딱 40분만 달리고 나면 순식간에 살만한 삶이 된다.
달리기를 하면 인간은 결국 호르몬으로 산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보다 겸허해질 수 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게 일어나는 일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저 기분에 따라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달리기를 하면 알 수 있게 된다.
숨을 헥헥거리고 나면, 땀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된다.
달리기를 하면,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생경하게 느낄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지고 있는 매일의 변화와 생명력, 그 속살을 알알이 느끼고 교감할 수 있다. 인간은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까지 하던데, 일부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을 탐구하는 자여, 부디 다른 것보다 달려보기를.
언젠가 한 번은 달리기 예찬에 대해 쓰고 싶었다.
최근에는 테니스 할 시간도 모자라 러닝은 하지 않고 있는데, 이렇게 예전 글을 다시 꺼내 들어 보니 이 비가 그치면 비 온 뒤의 여름 공원을 달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