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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15. 2024

냉커피를 마시고 두근거리는 가슴이 있다

침에 일어나면 눈이 부신다. 당연한 말이다. 햇빛이 내리쬐기 때문에 눈을 간신히 뜰 수밖에. 그런데 말이다. 몸속과 뇌 속은 다르다. 숨 쉬는 박자마저 느려지고 아득히 졸리다. 그런 상태에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현대인의 필수적 루틴이다. 싸구려 커피든 고급 진 필터 커피든 상관없이 들이켜본다. 머릿속은 이제 혈류들이 지나간다. 섬섬이 들어맞는 심장 소리. 그리고 뇌 속에 이어지는 투두 리스트가 번쩍 떠오르게 되면서 이불을 걷어차게 된다. 


내 이름은 송화이다. 여자 이름 같기는 하지만 어머니께서 중성적인 이름보다는 여성적인 이름이 사내아이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원체 길게 태어났고 코도 오뚝했으며 무엇보다 붉은 입술이 상징적이도록 아름다웠다. 그래서 아버지도 송화라고 부를 것을 처음에는 납득하지 않다가도 얼굴 보면 이해가 된다면서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크면 클수록 머리는 단정하게 뻗어나갔다. 나의 입술은 그래도 붉게 피어나서 남자애인데도 화장기가 보인다는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입술을 잘근 씹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았다. 거제도라는 섬에서 살고 있는데 많은 서울 사람들이 놀러 갔다가 한참 보고 지나가는 섬이었다. 이름만 유명할 뿐 무엇으로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반수였다. 나 역시 거제도에 살면서 뭐가 유명한 지 딱히 모르고 자랐다. 그저 남쪽 경상도 바다의 시원한 짭짤한 냄새가 머리카락에 달라붙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이제 조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들 하겠지만 나는 사실 그림을 그린다. 밖을 나가 연필로 작게 스케치를 하고 채색도 가끔씩 하고픈 날에는 한다. 그렇게 백수 마냥 살고 있지만 생각보다 벌이가 쏠쏠하게 나온다. 내 그림을 보고 식당 가게에서 걸어두게 그림 크게 그려달라고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거대한 도화지에 푸른 바다와 어머니들을 그려놓으면 식당 사장들은 만족해하며 10만 원은 거뜬히 쥐여줬다. 물론 내가 동네 어렸을 적부터 살아서 더 쥐여준 것도 있겠다. 그 돈으로 나는 다시 연필을 사고 그림을 그릴 종이 몇 장을 산다. 그러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학교를 다녔을 적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캐리커처나 만화를 그린 적이 꽤 많았다. 그리고 반응이 좋아 보이면 친구들에게 이쁨을 받으면서 화가가 될 꿈을 고이 간직했다. 그렇다 보니까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시간 이외에는 재미가 없었다. 미술의 역사를 배울 때마다 가슴이 벅찼고 특히 반 고흐의 비운적인 삶에 동경했다. 나도 평생 가난해도 되니 평생을 걸쳐 유명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저승 가서도 떵떵거리며 살 것 같았다. 친구들은 그래서 나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쟤는 꿈이 있다. 쟤는 그래도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어서 큰 사람이 될 거 마냥 보인다.처럼의 말들이 들렸다. 선생님도 그런 점을 아시는지 언제나 미술 점수는 100점을 주었다. 어깨가 항상 으쓱해하면서 성적을 받아 갔다. 


대학을 그러나 진학하지 못하였다. 내가 원하는 순수 그림을 그리는 곳은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반대해서였다. 또 입시 그림은 내가 상상했던 그림과 달랐다. 목적이 있는 창의성을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해함이 잔뜩 펼쳐졌지만 그 안에서 해석하기 나름의 교수님들 앞의 평가가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 오로지의 그림으로만 평가를 받고 싶은데 그림쟁이들의 기계식 입시 그림으로 나는 압살당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미대를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20대 초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왔다. 이곳저곳에서 일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불 앞에 서서 고기를 구운 적이 제일 많았다. 그때의 시급이 가장 괜찮았던 걸로 생각난다. 나는 그 시급으로 집 가면서 담배 한 갑을 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이 되면 몸이 쑤시도록 아파졌다. 그러다가 늦장 부리고 다시 돈 벌러 나갔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난 당시에는 그래도 자기 일을 하고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믿었는데 가장 걱정하셨던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이쁜 이름 놔두고 험하게 고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25살 때, 그림을 조금씩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그 당시에 웹툰의 인기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었다. 잘하면 나도 어떻게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한 컷당 얼마라고 쳐서 받는 줄 알았는데 10컷 당 20만 원 이런 식의 벌이었다. 나는 그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었다.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사람들은 올드 한 그림체라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나는 진중했다. 


어느 순간 그림들이 모아지고 모아져 팬층이 생겼다. 나를 찾는 사람들이 꽤나 생긴 것 같아서 화가로서의 본업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종이에다가 그림을 그렸다면 이젠 태블릿도 사고 시간에 쫓겨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침에 마시는 냉커피보다 저녁에 마시는 냉커피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밤샘 작업이 있는 날이었다. 내방에서 기계들을 하도 돌려서 윙 소리가 났다. 그 윙 소리가 가족들을 깨울까 봐 걱정이 돼, 새벽의 바를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림을 그렸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친한 사장님이었고 나의 그림이 이곳에서 잘 그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주었다. 거기서 마시는 냉커피 한 잔, 위스키 한 잔이 기깔났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손님의 자태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것을 토대로 그림에 넣어서 몇 컷의 배경으로 삼아줬다. 그렇다 몇 명의 뮤즈들이 뒤 배경으로 깔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날 어느 아가씨를 보았다. 이름은 솔. 그녀는 자주 오는 손님 중 하나였다. 솔은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솔의 머리색도 그래서 붉게 칠해져 있었다. 손톱은 그러나 아기자기한 편인지라 네일아트는 하지 않았다. 솔을 볼 때마다 냉커피를 마셨다. 친한 형 바텐더 진수는 계속해서 솔에게 작업을 걸었다. 솔은 그런 진수가 귀엽게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나는 솔의 골반을 따라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보니 뒷배경이 더 눈에 가는 그림을 그리고 말았다. 다시 처음부터 컷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솔은 그런 나에게 궁금증이 그날 생겼나 보다.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언제나 태블릿 피씨를 들고 있었고 무엇에 그렇게 열중하면서 예술가인척하냐고 물었다. 나는 예술가인 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중히 말했다. 그리고 다시 냉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타오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냉커피라고 착각하고 위스키를 마신 것이었다. 솔은 그런 나에게 무엇을 그리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정중히 물었다. 나는 그런 예의에서 오는 선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여태 한 작업 중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들 위주로 보여주었다. 그러자 솔은 놀랐다. 우리나라의 풍경이 이리도 아름다웠는지 몰랐다며 색상이 이렇게 다양한 줄도 몰랐다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또다시 냉커피를 마셨다. 이번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솔과 대화를 더하고 싶었지만 나는 데드라인이 걸쳐져 있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솔은 그런 나를 이해하고 자신의 술을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헤어졌다. 계속해서 느껴졌다. 텐션이. 그녀는 계속해서 나의 이름을 물었지만 송화라고 답하지 않았다. 나의 예명인 바다를 말해주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힐끔 보게 되었다. 볼 때마다 변하는 그녀의 움직임이 느릿느릿 해지더니 어느새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 그저 빨간 머리 앤의 순수함만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냉커피 때문에 계속해서 가슴이 뛰었다. 


다음 날, 나는 밤을 꼬박 새우고 바에서 나와 만화를 마감했다. 하루 만의 휴식을 온전히 갖는 날이 된 것이다. 그럴 때 가끔 만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더 이상 거제도에 살지 않는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겠다고 자취방을 얻어 나간 지 오래다. 나 혼자 거제도 바닥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래도 대학 나오지 않은 것치고는 잘 살고 있는 편에 속하는 것 같았다. 나름 세계에서 인정해 준다는 것만으로 사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고 오로지 냉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른 저녁에 바를 찾았다. 진수형은 나에게 웬일이냐면서 태블릿 없는 나를 보고 신기해했다. 쉬는 날인데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고 내 건강 걱정도 같이 해줬다. 그래서 그는 시그니처 냉커피에 레몬즙을 타서 나에게 건네줬다. 오늘은 편히 쉬면서 가라고 말해줬다. 고마웠다. 


오늘은 솔이 올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솔은 그러나 기대한 대로 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제 앉았던 자리에는 홀아비 아저씨가 앉아서 술을 진탕 퍼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바는 오늘따라 왁자지껄한 편이었다. 그 내가 원하던 분위기가 안 살자,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솔이 들어왔다. 오늘은 솔은 머리를 위로 묶어서 왔다. 그녀는 오늘도 빨간색 티셔츠를 입었고 긴 하얀색 바지를 입어 세련미를 더해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방긋 웃으며 내 옆자리로 앉았다. 


바다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라는 상투적인 인사와 함께 그녀는 어제와 같은 음료를 시켰다. 원래 자기는 오늘은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술이 당기기도 하고 어제가 너무 괜찮았던 하루여서 하루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에 왔다고 전했다. 그녀의 말에 약간의 설렘이 들어가 있었다. 혹시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것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냉커피를 마셨다. 적극적인 솔에 당황했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워낙에 좁은 섬이기 때문에 이곳저곳 찌르다가 온 여자일 수도 있겠다는 잠재의식도 들었다. 그러나 솔은 너무나 순수해 보였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증명했다. 곱기도 했지만 자유분방함을 이 나이 먹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솔과의 만남은 너무 상투적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잠자리도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뮤즈로 등극해주는 것이었다.솔과 자주 만나서 그녀에 대한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번의 만남으로 뮤즈로 살아달라고 말해주기 어려웠다. 나는 계속해서 솔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위스키 마시는 손은 귀여웠다. 나는 희미한 노란 불빛만 울리는 바에서 그녀와 진중하게 대화를 나눌 힘이 없었다. 상투적이게 갈 수밖에 없는 나의 목소리와 나의 철학. 너무 싫었다. 더 이상 나의 대화가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느끼한 드라마에 나오는 남주인공처럼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현실로는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묻는 말에 답변만 할 줄 알고 그것에 꼬리를 물어줘야 하는데 못하니까 결국 시시해졌는지 솔은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렇게 놓친 그녀가 너무나도 아쉬웠다. 내일도 만날 기회가 있더라도 나의 설렘을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나이가 들도록 여자 경험이 없어서인지 숫기가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녀를 더 이상 만나도 내가 먼저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그림 한 장만 놓고 가기로 결정하고 추상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붉은 색상이 강렬했던 그녀였기에 오로지 붉은색으로만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사람의 형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의 여러 가지 입체적이고도 평면적인 도형들 위주로 나열해 보았다. 내가 느꼈던 순수함의 머릿결을 표현하고자 물결무늬 직선을 많이 넣은 채로 그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아하니 마지막으로 냉커피를 세 모금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 모금. 그녀의 손가락은 아기자기했다. 두 모금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세 모금 이젠 그녀와의 인연이 끝나버렸다. 


나는 그 그림을 집으로 가져가 고이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느꼈던 가슴에서의 뜨거움이 찰랑거리던 냉커피의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를 향한 욕망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림을 펼쳐보니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미로 같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이 들어가 있는 그림 한 폭이었다. 나는 그런 추상주의적인 그림은 처음으로 그려보았다. 그래서 잭슨 폴락도 몬드리안의 결이 닮아진 것 아닌가 싶었다. 휘날리는 가슴을 안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우측 하단에 내 이름을 적는 것을 까먹었다. 바다가 아닌 송화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장롱 속에 말아서 넣어놨다. 내일 다시 그녀를 만나면 그 그림을 주고 싶다. 그녀가 나의 그림을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그림이었기 때문에 주고 싶다. 냉커피 마시고 나서 그녀가 생각났다고 하면서 주면 그녀가 받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순수한 여자이기 때문에 받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내일 그녀를 만나서 그 그림을 전해줄 것이다. 그녀가 오기를 바라며 한숨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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