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글날에 만난 친구가 그랬다. 자신은 자기 자신을 갉아먹었던 이유 중 하나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자신을 사회적 잣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기는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했다. 자신은 몇 년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자존감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이다. "남이 절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주장을 펼치면서 그녀가 했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현대 사회는 가치를 매기는 방법이 매우 일관적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길을 알려주고, 대기업에 취직해야지만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것이다. 결혼을 할 때 되면 남자는 이런 식으로 보여야 하며 여자는 저런 식으로 보여야 한다는 등도 기재돼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일관성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웠다. 어떤 친구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길 또한 위대해 보이지 않았다. 사회적인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시기 질투를 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 친구는 그러나 반대의 모습이었다. 몇 년 동안 걸린 시간이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어둠의 동굴 속에서 많은 고통을 보낸 듯했다. 웃기는 했지만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프긴 했지만 그 아픔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친구에게 듣는 몇 년 만의 진실을 나는 이제서야 들었다.
"우리 사회는 말이야, 단순하면서 복잡해. 사회는 요구하는 것은 그저 효율적인 인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렇다. 생업을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은 이상,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효율적인 인간상을 원할 뿐이다. 사회에서 벌어들이는 돈을 가지고 경제를 돌리기를 원하고 출산을 해서 사회의 지속력을 갖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학교를 보내고 자기 자신을 잊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수학 국어(비록 문학을 배우기는 하지만) 영어. 모두 3가지로 집중되고 그중에서 다른 과목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 괴짜로 불리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괴짜들이 많지 않았다. 다들 대학에 버둥거리느라 자기 자신을 잃은 채로 공부만 할 줄 아는 기계였다. 내 친구는 그중에서 훌륭한 기계였다. 선생님에게 이쁨을 받고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강점인 차분함으로 공부를 채워나갔다. 나는 그러나 반대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공부가 하기 싫어 빈둥거리고 나만의 세계를 펼쳐서 하루하루 글을 적으며 하루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고민만 하는 소녀였다. 그래서 우리는 차이가 나는 대학을 다녔다.
나의 대학은 정말 부질없었다. 그리고 실속도 없었다. 동기라고는 다들 술만 마실 줄 알았지 자신의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나는 겉돌았다. 그러나 내 친구는 자신의 실속을 차려서인지 자신의 흥미를 잘 찾아갔고 학교 적응도 꽤나 하는 편으로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3년간의 결실이 맺어져서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했다.
대학시절은 그렇게 4년이 지나갔다. 지나고 나니까 대학 시절의 나 또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지도 않은 채 지내가 버린 것이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우리는 먹고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수년 동안 고민했다. 고민 안 한 적이 없었다. 자기 전에 그렇게 불었던 한숨만 채워도 공기가 모두 이산화탄소로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또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은 되게 고통스러웠다.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공부만 하라는 사회적 요건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요건도 없이 잘 우리의 진로를 찾아가라고 했다. 신입을 원하는 회사 하나 없었다. 그저 경력직만 내립다 뽑거나 공채에서 치열한 경쟁 사회를 뚫어서 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친구는 고민했다. 자신의 눈높이와 자신의 상황을. 그녀는 워라벨을 챙기고 싶었다. 그리고 공무원의 자리는 싫어했다. 그녀는 자신이 들어가야 할 직군을 선택했고 집중한 결과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과정을 내가 간단하게 말해서 그렇지 우린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특히나 방황한 탓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택하였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내 친구는 침착하게 취업 준비를 밀도 있게 해냈다. 현재는 그녀는 만족스러운 직장을 다니지만 그래도 그녀도 욕심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머무를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공휴일에 만났다. 공휴일과 주말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안부를 카카오톡으로 묻는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은 아니다. 그녀의 속성은 달라졌다. 자신감이 넘치도록 꼿꼿한 목이 가장 인상 깊었다. 요가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자세도 발라져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하는 말이 진정성으로 담겨있었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진정으로 글쓰기였다. 덕분에 그녀의 한 말로 나는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도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발전은 그녀의 발상인 "남이 더 이상 부럽지 않다"에서 시작되었다. 남들의 눈치를 보고 살기에는 날이 짧다. 서로 자신이 타고난 것이 있다. 어떤 이가 갖고 있는 재능과 돈이 부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념할 줄 아는 마음이 오히려 속 편하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재능과 돈, 그리고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걸 소중히 여기다 보면 나의 존재 가치가 올라갈 것이고 사회의 효율성을 이겨내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친구는 그래서 천재였다. 그 진리를 깨달은 것 자체만으로 천재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한 커피향이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