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쁜 숨이 턱까지 차올라 조금만 도(度)를 높이면 곧 죽을 것 같은데 꾸역꾸역, 예서 멈출 수 없다며 오르고 또 오른다. 그렇다고 내려오는 일은 만만할까? 전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못 내려오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음을 몰라선 안 된다. 거창하게 인생사도 그렇단다.
결코 낮지 않은 정상을 코앞에 둔 듯하여 묻고 또 묻는다. 한없이 부러운 먼저 오른 이들에게 말이다.
“다 와 갑니까? 정상이”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대답은 골라서 듣는다.
“예! 얼마 안 남았어요”
하지만 저들 기준과 내 기준이 같을 리 없으니 때론 속으로 중얼거리며 산(山) 선배들을 욕하고 말 때도 여러 번이다. ‘아니 얼마 안 남았다더니 왜 이렇게 정상이 나타나질 않는 거야’ 라며.
자기들이야 정상에 먼저 발을 디뎠다고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더란 말인가? 그러면 ‘아직 한참 더 고생하셔야 해요’라는 나름대로의 답변은 괜찮다는 의미일까? 그것 역시 아닌 듯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종을 잡질 못하겠다. 너무 힘들다는 반증이겠지만.
삶의 찌든 땀과 두 어깨에 드리운 온갖 세상살이의 무게를 단번에 “솩” 씻어주는 정상에서 맞는 그 바람의 터치를 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일단 올라와 보시라고 할 수밖에는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반갑게 보듬어 주는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꼭대기 말고 세상 또 어디더란 말인가?
그 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땅만 내려다보며 콧방귀나 뀌어대는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죽었다 깨나도 모를 뿐이다. 애벌레에서 깨어나 넓디넓고 푸르기만 한 창공을 날아 본 나비가 아니고서야.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나서 최첨단 이론 동원해가며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삶을 그 애벌레에게 설명한 들 먹히기나 하겠는 가 말이다.
하지만 이렇듯 좋기만 해도 산 정상 그곳은 잠깐뿐 하루를, 아니 한 달을, 일 년을 머물 수는 결코 없다. 역시 나를 위해 정지해 주질 않는 세월의 흐름처럼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은 순간일 뿐이라잖은가?
내려와야 한다. 오른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높고 가파른 정상에서의 환희가 덜 높고 덜 가파른 높이보다 낫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속세에 찌들지 않으면서 이슬 먹고살겠습니다’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높이 오른 산일수록 더욱 조심조심 내려와야 한다. 단지 조금 먼저 오른 것일 따름인데 과도한 교만을 떨어댈 수는 없다. 그곳에서의 환희 역시 지나가고 말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000미터 높이의 낮지 않은 산을 올랐다면, 오르는 과정이 필사의 노력이 투자되었다손 치더라도 하여 아깝고, 놓고 싶지 않을 기쁨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내려오지 않을 이는 세상에 없다. 1,000미터만큼을 똑같이 내려와야 한다.
아깝다고 800미터만 내려올 순 없다. 아니 정말 너무 아까우니 '998미터만 내려올게요'가 가능치 않다는 얘기이다. 반드시 올라간 높이만큼 내려와야 한다. 올라가 누린 권세만큼, 영예만큼 내려놓아야 한다.
오른 정상도, 누린 권세와 명예 온갖 환희 역시 끝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내려놓고 돌아와야 한다. 그곳은 잠시 머물 일시적 장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오른 자만이 정상이 선물하는 쾌감을 맛볼 수 있기에 곧 내려와야 함에도 올라가고야 만다. 꾸준히 올라오는 다음 행렬에게 겸손하게 정상을 넘겨주며 먼저 경험한 자의 특권으로 주의사항 전달하며 말이다.
아니 머지않아 죽을 텐데 왜 사세요? 조금 있으면 배고플 텐데 왜 먹느냐고요? 질문이 꽤나 일리 있는 듯하잖은가? 곧 내려와야 함에도 올라가야 한다. 잠시 후면 또 배고플 것이고 또 얼마쯤 살다 보면 죽어야 할 테지만 살아야 하고 먹어야 한다.
끝이 있고 지나가지 않는 것이 없는 순간의 삶이기는 해도 그리고 결국 내려올 산이지만 지금도 쉬지 않고 정상을 향하고 있다. 욕심은 금물이며 자족을 발견하기가 난제이지만 올라가야 하고 예외 없이 올라간 만큼 내려와서는 빈손을 세상에 펼쳐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