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장수 100세 시대를 구가하겠다는 21세기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기간 중 절반 이상을 뚝 떼어 낸 56년간 학교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다 나온지 이제 겨우 2년쯤 지났다.
8살에 처음 학교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인연(입학)을 시작했으니. 취학전 7년, 퇴직 후 2년 지금까지 모두 9년 만 학교 밖 생활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이까지 자동 계산이 된다.
아니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며 산다니 삶 전체가 사실은 평생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 뿐 바깥 세상은 모른다 해야 맞을 테다.
그래도 광의(廣意)의 학교보다는 협의(狹意)의, 일반적으로 일컫는 학교 관련 삶을 반백년 이상 살아왔다는 나름 특수한 상황을 의미한다, 나의 학교 생활이란.
오롯이 학교에서 집, 집에서 학교로 뱅글뱅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던 학창 시절, 마치 벗어 나기라도 하면 깜깜한 밤 사막 한가운데 어디 쯤 떨궤진 약하디 약한 존재로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두려웠다. 요즘처럼 학교 밖에도 즐길 거리들이 지천이었다면 혹시 어땠을지.보안까지 철저하고.
학교의 보살핌, 부모님 슬하는 세상 그 어떤 걱정과 염려도 감히 뚫고 들어 올 수 없는 에어돔(airdome) 같은 안전한 은신처 였다. 그런 온상을 벗어나면 드넓은 세상으로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맘껏 뜻 펼치며 자유를 만끽할 줄 알고 말고였잖은가?
막상 2년 여를 지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가 그립고 돌아가고픈 마음이 불쑥 불쑥 솟구칠 때도 적지 않다. 마치 고향이라도 되는 양.막상 또 돌아가라면 어떨 지 자신은 없다.
내게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는 학교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었다. 같이 아파했고 환희에 차 기뻐 어쩔 줄 모를 땐 누구보다 더 자기 일처럼 좋아했던 교직 생활 40년, 한 몸처럼 살아 왔으니. 오롯이, 그나마 아는 척 좀 할 수 있는 든든한 자산이었다.
학교, 주인인 학생들, 동료 교직원들의 꿈틀대는, 영원히 늙지 않는 푸릇푸릇함이.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학교 건물과 운동장, 부대 시설, 튼튼하게 우뚝선 큰 나무들이 간직한 아련하고 나지막한 속삭임이 귀를 간질이고 있다.
56년 세월(학창시절 16년+교직생활 40년=56년) 학교 이야기는 조선 5백년의 장구한 역사 기록만큼 내겐 길고 굵직굵직한 삶의 궤적이다.
학교 문을 들어서면 반겨주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던 운동장이 말을 건다. 그 얘기부터 시작하련다. 또 맘 내키면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 심도 있게는 우리네 교육 관련 제도까지 교육 유사(遺事)에 남길 수 있으려나?
한참을 걸어도 또 뛰어도 도무지 한바퀴를 돌려면 '왜 이렇게 운동장이 넓지?' 수도 없이 되뇌이며 걷고 뛰고를 섞으며 마무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교생이 체력을 단련했던 국민 체조 시간, 그 마지막 숨쉬기 운동을 실시하며 헐떡 헐떡 가쁜 숨 가라 앉히곤 했잖은가.
덩쿨 나무로 그늘을 만들어서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낡은 벤치가 듬성듬성 놓인 쉼터, 학교가 세워지던 첫날부터 모든 것들을 컴퓨터 저장 장치처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기억하며 간직 중인 운동장 가 은행나무들.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신설 학교의 멋진 전통 세우기의 역사적 참가자가 되겠다며 운동장 돌멩이 하나까지 고르고 솎아내며 반듯하게 일궤냈던 교사들, 그렇게나 넓어서는 목까지 차올라 바트게 숨 내밷던 트렉이 너무도 아프게 지금은 한 뼘 밖에 되지 않으니.
철봉과 평행봉, 모래판 씨름장이 나와 나눈 이야기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이리저리로 흩어지기 전 모아내리라.
철봉에 매달려 힘에 부쳐가면서까지 차올렸던 턱걸이 10개, 요즘은 그 마저도 쉬이 볼 수 없는 옛 장면이 되고 말았으니. 체육과에 진학하겠다는 학생들이 실기 시험 대비로 이따금 체력을 측정하곤 할 때나 쓰일 뿐.
평행봉 운동은? 아무나 쉽사리 할 수 없는, 난이도가 비교적 높은 활동이기에 철봉만큼의 인기조차 누리질 못했으니. 찬밥 신세임을 알긴 했을까?
용도 폐기 직전인 모레판 씨름장은? 오로지 1년에 한 두번 정기적인 체력 검사 때 넓이 뛰기 거리 측정을 위해 써레질 될 뿐이었니 잘 나가던 옛날이 얼마나 그리울까? 물론 우리네 전통 종목 씨름을 운동부로 지정해 키우는 학교에서야 다르고 말고 이겠지만 말이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자장가처럼 마이크를 통해 흘러 나오던 구령대 옆 벤치, 그곳이 그렇게도 외워지지 않던 영어 단어 암기 상태를 검사 받는 곳으로 변신 했으니. 집에 돌아갈 시간이 훌쩍 넘었는 데도 통과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올망졸망 사랑하는 아이들, 그들에게 왜 그리도 못할 짓(?)을 했는지? 그깟 영어 단어가 뭐라고.
사대(師大)를 막 졸업했는데, 교사라며 저들에게 부렸던 권위(?)가 아프다. 신출내기 교사나 아이들이나 거기서 거기 였었는데. 씌워 준 완장의 위력은 컸다.
1980년대 초반, 운동장을 잔디 구장으로 면모를 일신 시키겠다는 어느 학교장의 신념(?) 때문에 동네 언덕과 논밭둑의 잔디처럼 생긴 풀들은 모조리 캐왔던 아이들, 그로 인해 발생한 민원까지 숱한 사연을 운동장은 말없이 속 깊은 곳에 감춘 채 털어 놓을 날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조금씩 잔디로 채워져 가던 운동장도 어쩔 수 없다며 두 손 두 발을 결국은 들고 말 수밖에. 처음부터 잔디 구장화 하겠다는 무리수를 학생들과 운동장이 고스란히 경험한 목격자가 되고 만 것이다. 따로 큰 예산 들여 시행할 사업을 학생들이 모아오는 잔디 한 삽, 한 삽을 모아 메꿰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였잖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저 만만한 게 운동장이라고 부속 건물, 교내 식당, 강당 겸 체육관에게 그 온전함을 빼앗길 수밖에 없던 처지라니.
부지 확보가 어렵기만 한 요즘, 작아질 데로 작아진 처지를 보고 있으려면, 이유 설명이 명확지는 않지만, 답답함이 먼저 알고 찾아 온다. '어쩌면 좋겠냐구'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분양하는 게 우선 이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운동장 용지 확보가 그 옛날 한바퀴만 돌아도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들었던, 이쪽 축구 골대에서 맞은 편 골대까지 정규 축구장 규격에 가깝게 컸던 운동장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유물처럼 쪼그라 든 까닭이다.
그렇게 우선권을 빼앗긴, 좁디 좁게 자리 잡은 운동장에서는 도무지 그려낼 수 없는 풍경이기에 아련할 뿐이다. 좁아진 그 운동장엔 오늘도 조물조물 아이들의 움직임이 그러나 생동감 있다.
그 시절 자신들 또래 쯤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며 이따금 아련함과 더불어 학부모가 되었을 아이(?)들의 끝없는 수다도, 영원히 늙지 않는, 진시황제가 그렇게 찾겠다며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끝내 찾지 못한 불로초가 사시사철 피어 있는 교실에서 교사로서 더불어 누렸던 불로(不老)의 혜택을 풀어 낼 장(場)을 교육 역사기(歷史記)에 남기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