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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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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Sep 10. 2023

잊고 지낸 인연

기다릴 게 없으면 시간이 빨리 가


아침저녁으로 한결 시원한 바람이 분다.  

8월 에어컨 밑에서 집순이로 한 달을 보내고 9월이 되고서야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가끔 못 만났던 분들과 식사 약속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지인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향 좋은 커피까지 즐기며 우아한 백수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젊은 시절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언니랑 늘 먼저 안부 물어보시는 공직 선배인 국장님이랑 한가로이 수다 삼매경 중이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10년도 넘었지요?'

'10년이 뭐니? 거의 20년쯤 되었을걸?'


옛이야기까지 소환해 가며 대화가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국장님이 벌써 70이 넘었다고 하신다. 

막내인 내가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고 넋두리처럼 하소연했더니 국장님이 빙그레 웃으신다.

재미난 얼굴로 엄청난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듯, 한참을 뜸을 들이다


'내가 가르쳐 줄까?' 


'기다릴 게 없으면 시간이 빨리 가'


'아~~~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잠시 생각에 빠져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초등학교 때는 멋진 동네 언니와 오빠들처럼 근사한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빨리 입학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빵집에서 미팅도 하고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는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간절한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때 나의 시간은 정말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갔었다.


여름 방학 때 좋아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매일 대문 우체통을 보면서 답장을 기다렸던 날도 그랬다.

그 답장을 받았는지조차도 희미하지만, 그 기다림만큼은 분명 길었다.


아버지 월급날은 누런 봉투에 닭 한 마리 튀겨오는 날! 

하루 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며 꼴깍꼴깍 침을 삼켰던 그날도 고장 난 시계처럼 긴 하루를 보냈다.

방학을 기다리던 날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그날도 

시간은 참 더디 갔던 것 같다. 


오늘 주문하면 새벽배송으로 다음날 오는 세상

친구의 연락도 연인의 고백도 카톡으로 전하는 세상

모든 게 풍요로워서 바랄 게 없는 세상!

기다림이란 단어를 잊고 사는 세상!


초고속 세상이 되었다.




지난주 그림 수업이 한참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참이 지나 휴대폰을 보니 재직시절에 같이 근무했던 공익근무요원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전화를 안 받으니 다음 주에 저녁 시간을 내달라는 문자까지 와있었다.

하필이면 제주도 여행을 가는 날 만나자는 문자였다.

아쉬운 마음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첫 월급을 타서 동장님께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잠시 4년 전  만났던 젊은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그해 눈이 참 많이 와서 툭하면 비상근무로 날밤을 세우는 날이 허다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공익근무요원까지 총동원이 되어 눈을 치웠다.

불평 한마디 않고 같이 동참해 준 친구들이 한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눈 치우다 말고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친구 두 명에게 웃어가며 공무원이 되면 힘이 세야 해. 

눈 치우고, 산불 대기하고, 비바람 치면 간판도 치우고, 막노동도 해야 한다고 잔뜩 겁을 주며 놀렸다. 

그중 한 친구가 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공무원이 되었다.

공직 후배가 된 그 친구가 첫 월급을 탔다고 전화를 한 거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왔다.

어릴 적 죽고 못 살 만큼 친했던 친구 이름도 잊고 살았는데 전화를 받고 보니 고맙고 행복했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대사 중에서  

'한 번 만난 인연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을 뿐이다.'라는 인연에 대한 말이 새삼 생각이 났다.  


그동안 소중한 인연들을 잊고 있었다.

젊은 친구의 전화로 소중한 인연을 스쳐가는 인연으로 가볍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속은 다음 달로 미뤘으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다.

'기다릴 게 있으니 이번 달은 시간이 더디 갈 거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 9월의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인연과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 알아차리며 한 달을 느긋하게 살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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