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소진되었구나!
자고 일어나면 손이 부어 구부러지지 않았다.
한두 시간 지나 괜찮아지던 손가락 부기가 심해 동네 한의원 침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 생긴 대형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퇴행성 관절염이라며 별스럽지 않게 이야기했다.
많이 써서 온 병이니 손가락 쓰는 집안일은 하지 말고 약 먹고 물리치료 받고 가라고 한다.
나보다 젊은 의사 선생님이 뻔한 의학 정보를 기계음처럼 들려준다.
나을 수 있냐는 물음에 심하면 약 먹고 자주 와서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한다.
같은 말만 반복하던 의사 선생님이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위로는커녕 풀이 죽어버렸다.
한참 재미를 붙인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가 모두 손가락을 사용해야 하는데 속이 상했다.
'수십 년을 사용했으니 뭐 아플 때가 된 거지.'
쇠약해진 중년의 아줌마가 넋두리처럼 혼자 중얼거려 본다.
직장 다니며 만성 소화불량과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퇴행성이구나.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받았는데 한 달이 넘어도 차도가 없다.
'혹시 의사들이 병명을 모를 때 적당히 접두어로 쓰는 말 아니야?'
괜한 심통에 나아지지 않는 것을 의사 탓으로 돌려본다.
아프기도 하고, 살짝 뿔 딱지도 나서 살림도 그림도 글쓰기도 다 귀찮아졌다.
검은 구름만 낀 하늘을 보는 것처럼 우울한 며칠을 보냈다.
나를 위한 시간을 내어준다!
다 끌어안고 사는 성격이라 괜찮다고 생각해도 힘든 순간이 온다.
퇴직이란 결정을 하고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부지런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관절염이 반갑진 않지만,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픈 손가락 탓에 설거지는 남편이 해주고 딸은 식기 세척기를 주문해 줬다.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대신해 준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일상이 그런대로 유지 되었다.
매끼 집에서 먹던 밥도 한 끼 정도는 나가서 먹는 호사도 누리고 산다.
가끔 글 안 쓰냐는 지인들도 있지만 글 쓰는 시간이 줄어든 대신 좋은 글을 읽는 재미가 늘었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당뇨는 경계선상에 있었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아 위험하다고 했다.
약을 먹는 대신 운동을 시작했고 올해는 다행히 수치가 조금 떨어졌다.
지금부터는 관리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멈출 수 없는 퇴행이지만 속도는 조절이 가능할거로 생각해본다.
그래 의사 선생님 말대로 위축되지 말고 쉬엄쉬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보자.
무덥던 여름날도 성큼성큼 흘러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오늘 밤 공원에서 뿜어나오는 알싸한 풀 향기 맡고 벌레 소리 들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즐겁게 걷고 있다.
이 밤! 나를 위한 시간을 내어 준다.
오늘도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