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두 번째 계약서를 쓰며
며칠 전,
예전에 헬퍼 언니를 처음 고용할 때 도와주었던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왔다.
“재계약 하실 거면 저희 통해 주세요. 수수료는 이 정도고, 계약서는 고용부에 송부해드릴게요.”
익숙한 말투, 익숙한 절차.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웃음이 났다.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낯선 나라에서 쌓인 시간과 자신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정중하게 고맙다고 답하고, 조용히 컴퓨터를 열었다.
계약서를 쓰며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다시 타이핑하는 순간,
문득 마음이 멈칫했다.
그녀는,
처음 우리 집에 왔던 그때보다 두 해를 더 살아냈다.
나 역시 그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더 자주,
세월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조용히 접힌 눈가 주름이,
어느 날은 깊어진 말투의 어조가,
아무렇지 않게 내 마음을 스쳐갔다.
그녀의 청춘이,
이 집 안에서, 내 아이 곁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 시간은 단순한 근무의 누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아이의 첫 걸음마를 함께 지켜본 사람이고,
나는 그녀의 오늘을 매일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단순한 고용 관계를 넘어,
우리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생겨 있었다.
말보다는 시간이 만들어낸, 조용한 유대.
그렇게 계약서를 마무리한 다음 날,
아이에게 갑작스러운 구토가 찾아왔다.
물을 마셔도 다 토했고,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나는 아이를 안고 새벽 두 시, 조용히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
“언니, 병원에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기저귀랑 담요 좀 챙겨주세요.”
그녀는 놀란 얼굴로 일어났고,
나는 초조함에 숨이 가빴다.
짐을 싸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손은 내 마음만큼 빠르지 않았다.
그리고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조용히 정수기 앞으로 갔다.
“잠깐만요, 목이 말라서요…”
그 순간,
쫄쫄쫄 흐르는 정수기의 물줄이가
끝없는 지연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국 다그치고 말았다.
“언니, 지금 아이가 아파서 급해요.
물은 병원 가서 마셔요.”
그녀는 물잔을 내려두고 말없이 따라 나섰다.
그리고 차 안, 침묵이 흐르는 중에도
조용히 나를 향해 말했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저는 괜찮아요. 이해해요.”
그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칠 이유가 없었다.
근무 시간도 아닌 새벽이었다.
자는 중에 불려나와,
물 한 잔 마시겠다던 그녀를 다그친 건,
전적으로 내 조급함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조용히 사과했다.
“아까는 제가 너무 예민했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남편분 안 계시니 얼마나 더 걱정되셨겠어요.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나는 부끄러웠다.
단 하루 전,
그녀의 청춘과 나이듦에 대해
애잔하고 고마운 마음을 품었던 내가,
몇 시간 만에 그녀를 재촉하고 다그쳤다는 사실이.
그날 하루,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아이의 상태는 조금 나아졌지만,
온종일 헤롱헤롱한 정신으로 아이를 돌봤다.
그리고 저녁,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제가 아기랑 잘게요.
어제도 못 쉬셨잖아요.”
그녀의 배려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잘게요.
너무 고마워요. 푹 쉬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아직도 미성숙한 사람이고,
그래서 더 잘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엄마로서, 고용주로서,
어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지만
어쩌면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끝에서, 말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배려를 보며
나는 자주 돌아보게 된다.
내가 놓치고 지나쳤던 마음들,
급한 숨 사이에서 부러진 온기들을.
어젯밤처럼 내가 날카로워질 때에도
그녀는 늘 조용히 나를 이해해주었다.
어떤 날은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함께 살아간다는 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기다려주는 일이라는 걸
그녀를 통해 배웠다.
어쩌면 계약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이를 설명하기엔 너무 무미건조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한 시간’을 계약했고,
‘쌓여가는 신뢰’를 나누었고,
서로의 삶에 아주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녀와 다시 계약서를 쓰며,
나는 더 단단해지고 싶어졌다.
더 다정하고, 더 안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청춘이 나의 하루 속에 머무는 이 시간을,
나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4년의 시간이 다 흐르고 나서
돌아보게 될 그날이 온다면,
나는 오늘의 이 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싶다.
부끄러웠지만 진심이었고,
미안했지만 따뜻했고,
서툴렀지만 함께였던 시간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