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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까워지기 직전의 마음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의 배려, 그리고 고요한 신뢰에 대하여

by 담연

얼마 전, 임신 테스트기를 해보았다.
아직 생리 예정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몸에서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올라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고,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선명한 두 줄.


한눈에 봐도 확실했다.


첫째가 아직 어린 만큼 둘째에 대한 계획은 없었지만,
막상 두 줄을 확인하니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기분은 이미 하늘 위로 날아가 있었고,
조심스러운 설렘이 조용히 가슴 안에 자리 잡았다.


첫째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출산을 했던 터라
이번에도 무척 자연스럽게,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했고, 따뜻하게 축하해주었다.

이 소식을 알려야 할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니젤이다.


4개월 후면 그녀와의 재계약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면
당연히 그녀의 일상도 바뀔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거실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임신 사실을 알렸다.

니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주었다.


그 미소 뒤에 어떤 생각들이 스쳤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 따뜻하고 진심이었다.


며칠 뒤, 토끼맘 친구들과 함께
아이 뮤직 클래스를 들으러 갔다.


몸은 조금씩 피곤해지고 있었고,
아이와 단둘이 가기엔 벅찰 것 같아
니젤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엄마들은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들어가고
헬퍼들은 복도 건너편 카페에서 잠시 앉아 있었다.


모두 필리핀 출신이었고,
그들끼리 웃고 이야기하며
짧은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문득, 내 안에 작은 물결 하나가 일었다.
‘혹시 니젤이 내 임신 이야기를 다른 헬퍼들에게 전했을까?’

같이 수업을 온 엄마들 중엔
아직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고,
나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안정기에 접어든 뒤,
자연스럽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괜한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이 자꾸 마음을 맴돌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 임신 이야기, 친구들한테 말했어?”

니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양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Mam! It's a privacy! I don’t tell!”
(“그건 프라이버시예요! 절대 말 안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에게 ‘프라이버시’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어딘가 놀러 가서 사진을 찍을 때,
내가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와 내가 나오지 않게
풍경만 조심스럽게 담던 모습.


아기를 누구보다도 예뻐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나는 오히려

좋은 곳에 놀러가면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게 했고,

그 사진을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송해주곤 했다.

그녀는 그 사진을 조용히,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내 임신 소식은
그저 기쁜 일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뤄야 할 ‘나의 것’이었다.
그 마음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임신은 겨우 5주까지만 유지되었고,
산부인과에서 받은 피검사 결과는
화학적 유산이라는 진단이었다.


감정이란 건 예고 없이 무너지는 법이다.
그날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슬픔이 몰려왔다.


나는 니젤에게 조용히 사실을 전하고,
그대로 자리를 옮겼다.
몸도 지쳤지만,
그 순간에는 더 말을 이어갔다간
나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눈이
조용히 글썽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말 한마디보다 더 깊은 공감이,
그 눈빛 안에 담겨 있었다.


우리 집의 거실, 안방, 작은방에는
보안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요즘은 많은 집에서 사용하는 장비지만,
그 공간은 그녀가 생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니젤은
그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한 번도 불편함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섬세하며, 선을 아는 사람.


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그녀는 더 조심스럽게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우리는 가족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그 안엔 여전히 넘지 않는 경계가 있다.


어쩌면 그 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존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중한 여백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여백 위에,
작고 단단한 신뢰가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앞 연못에서,아기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니젤의 모습.따뜻한 햇살처럼 두 사람의 미소가 빛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경계를 존중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작은 사랑을 나누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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