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은 추억의 통로
나는 마산 자산동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경남 고성으로 이사를 갔다. 발걸음은 다시 울산으로 밀양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고향을 물어보면 밀양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밀양강의 은어 떼와 위양못의 봄물, 사자평의 억새, 그리고 내일동과 내이동, 삼문동, 가곡동의 실금처럼 퍼진 골목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밀양. 빽빽할 밀. 볕 양. 이름 그대로 햇볕이 가득하고 뜨겁다. 여름이면 폭염주의보가 이어지는 전국에서 가장 더운 곳. 초등학교 5학년 밀양에 처음 갔을 때 아 여기 시골이구나 생각했다. 도로는 좁았고, 외곽에 한국화이바라는 공장이 하나 있는 걸 제외하곤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농번기에는 학생들도 모내기와 벼베기 하러 나갔다. 조금만 걸으면 논과 밭이 이어졌고 영남 알프스라 일컬을 만큼 천황산, 재약산, 가지산이 병풍처럼 둘렀다.
내이동 집은 기억이 선연하다. 화교 아저씨가 하던 중국집 복천원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오면 우리 집이었다. 달집이라고 해야 하나. 만월이다가 초승달도 되는 집. 밖에서는 작은 달팽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넓고 충만했다. 앞마당에는 인어 조각상이 있는 연못이 있고, 우물이 있었다. 수도를 쓰면서도 우물은 늘 유용했다.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를 우물 아래 달아 두었다가 저녁에 두레박을 길어 꺼내 먹었다. 성가시게 더운 날 등목을 하면 윗니와 아랫니를 덜덜거리며 부딪칠 정도로 서늘했다. 집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어 웃음과 냄새가 흘러들었다. 밥 뜸 들이는 냄새, 연탄불에 된장찌개 졸아 가는 냄새가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마당은 햇살과 빗줄기를 시시때때로 받아내었고 오빠와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쪽마루에 앉아 처마 끝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별똥별 탐험대를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건축가 승효상의 말처럼 그 시절 집은 우리 존재 자체였다.
밀양은 내가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이하며 살도록 이끈 곳이다. 중학교 1학년 하교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국어를 담당하던 이재금 선생님께서 손짓을 하셨다. 선생님은 사전처럼 두꺼운 책 두 권을 내밀며 독후감을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책과는 거리가 먼 괄괄이었다. 집에 와서 난감한 기분으로 드러누웠다. 묘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쩔 것이냐. 일단 책을 펼쳐 보았다. 아이고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너무 어려웠다. 라스꼴리니꼬프, 알료나 이바노브나,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표르피리, 스비드리 가이로프. 나는 금붕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두 장을 넘기면 계속 이름을 까먹어서 앞장의 인물 소개를 다시 들여다봤다. 도대체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알 수 없었다.
백지에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써놓고는 그것을 외워가며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여백이렷다 오기 끝에 결국 책을 다 읽었다. 읽는 내내 선생님을 원망했지만 가슴은 이상한 흥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 문학의 뻑적지근한 감동이었다. 인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되는 당대 러시아의 혼란과 부조리, 알료나 이바노브나처럼 늙고 백해무익한 존재를 죽이고 그 재산으로 사회에 선한 일을 한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 후 불안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라스꼴리니코프의 내면을 몸서리쳐질 정도로 치열하게 묘사해가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피요트르 경감에게 자백하고 8년간 유형 생활을 하면서 소냐의 헌신적 사랑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박진감 있는 전개를 따라가면서 나는 어떤 경이를 맛보았다. 어떤 뜨거움,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몰아쳤다. 나는 말수가 줄어들고 책에 빠져 들었다. 다음에 읽었던 작품이 이문구의 장한몽과 관촌수필이었고 3학년 때 소설가 이문구를 직접 만났을 때 가눌 수 없는 분노와 격정과 슬픔으로 돌진해 가슴을 들이받았다. 관촌수필의 연작중 하나인 공산토월 때문이었다. 선하디 선한 석공을 도대체 왜 죽였느냐는 것이었다. 이문구 선생님은 허허하고 마냥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분도, 천둥벌거숭이 나를 문학으로 이끄셨던 이재금 선생님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급하게 시골집을 팔고 밀양을 떠났다. 오빠와 나는 대학을 진학하면서 밀양을 떠났으니 이제는 외지에서 산 세월이 더 오래다. 그래도 밀양은 나의 고향이고 모든 추억의 통로이다. 집 마당의 보랏빛 꽃대를 세우는 오동나무, 석 달 열흘을 붉다가 여름 끝물에 지던 배롱나무, 치자나무와 감주나무, 분홍빛 상사화도 그립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던 벼. 화염 같은 햇볕 속에서도 매일 깨밭에서 살던 아주머니들. 겨울이면 마을 경로당에서 살던 할머니들도 그립다. 고구마를 먹고 말린 감을 씹고 십 원짜리 화투를 치고 별일 아닌 것에 다투기도 하면서 딸기밭에 딸기가 올해엔 싱거웠고, 고속도로 터널이 땅 밑으로 지나야 하나 위로 가도 되나 누구 집에 염소가 불고 누구 집에 누렁이가 밤새 안녕이라던 그 말들이 속삭댄다. 노루꼬리 마냥 짧은 겨울 해가 지면 마을의 외양간도, 수수 뭇도, 나락 베고 갈아엎은 땅도 어둠 속에서 살아있는 것 같던, 마음 이랑과 고랑에 온갖 꿈과 이야기들이 두런두런 자라던 밀양.
올 가을에는 밀양을 다녀올까 싶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리운 만큼 밀양을 마음 깊이 묻어두려 했다. 그러나 밀양은 내 마음속 바다에 쉼 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밀양강에 그물을 펼치며 은어를 잡던 아버지, 언제나 친구 같았던 아름다운 어머니, 착하고 영민했던 오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례와 위양못을 뛰어다니던 말괄량이 내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영남루 대숲의 바람 소리도 듣고, 아랑각의 아랑에게도 인사를 해야지. 밀양의 대표 음식이라는 돼지국밥도 먹어봐야겠다. 자장면 먹는 날은 횡재하는 기분이었는데 복천원과 태화루의 자장면 맛은 또 어떨지. 밀양이 자꾸 내 옷 사품을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