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그리운 아버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홍역에 걸렸다. 학교도 분교밖에 없던 작은 어촌마을. 한밤중 고열에 시달리자 아버지는 나를 업고 마을의 작은 의원을 향해 달리셨다. 결국 응급처치를 받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힘든 일이 있거나 시무룩할 때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곤 한다. 아버지의 등은 치유의 힘이 있어 보였다. 그후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별 탈 없이 성장했고, 오빠와 나 모두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아버지는 노인이 되어 갔다. 평생을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내신 분이라 우리는 별 걱정 없이 아버지의 건강을 낙관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검진 중에 의사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며 폐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서둘러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고 몇 번 결과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외과적 수술이 불가능할 만큼 병기가 진행된 상태라 항암 치료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우리 모두는 황망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셨다. 그리고 병원의 치료 일정을 성실하게 진행하셨다. 시골에서 3주에 한 번씩 서울로 항암제를 맞으러 오시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치료의 과정은 맑음과 흐림을 반복했다. 어느 날은 상태가 호전되고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느 날은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묵묵히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르고 환자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충실히 지키셨다. 여러 책을 읽으며 병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의사가 예후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동안 치료를 쉬셔도 되겠다고 했다.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그날만은 환하게 웃으셨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구나 네 엄마를 지킬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든다고 하셨다.
그러나 희망은 곧 깨어졌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전화기를 통해서도 아버지의 숨이 매우 가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서울역은 잊을 수 없다. 종착역이라 사람들 모두가 내렸는데도 아버지는 한동안 보이지 않으셨다.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힘겹게 부축하고 내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너무나 쇠약해지셔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셨다. 그 몸으로 서울까지 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동안의 고초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플랫폼을 벗어나 주차장까지 가야 했지만 아버지는 몇 걸음도 못 가고 자꾸 주저앉으셨다. 나는 울음이 터졌다. 괜찮다, 울지 마라 아버지의 목에선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났다.
의사를 만나자마자 응급상황이 진행되었다. 잠시의 서울 나들이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병원에 오시고 아버지는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 시간 동안 아버지의 몸은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갔지만, 정신은 너무나 명징하셨다. 끊임없는 검사와 처치가 이루어졌고 신체의 고통은 심해졌지만 아버지는 맑은 정신으로 버티셨다. 어느 날 담당의가 중환자실로 옮겨 연명치료를 받겠냐고 물었을 때 자신이 결정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누워 계셨다. 온갖 생각이 아버지에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연명치료를 거부하셨고,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놓고 며칠 내로 시골집으로 내려가겠다고, 밀린 일을 마무리하고, 어머니와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싶다고 하셨다. 등이 아프다고 하셔서 어머니와 나는 교대로 침대 위로 올라가 등 뒤에서 아버지를 아기처럼 안고 있었다.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들 손주와 사위 모든 사람과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몇 시간 후 돌아가셨다. 의식이 숨바꼭질하면서 조금씩 명멸해가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셨고 작은 반응들을 하셨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용기를 잃지 말아라. 육신을 땅에 묻는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우리의 슬픔은 망망대해 같았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나의 뿌리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고 우리 가족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불 꺼진 집에 남편 없이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서울살이를 시작하셨다. 사위와 딸이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는 큰 집에 우두커니 앉아 얼룩진 얼굴로 하루를 보내셨다. 오빠와 나는 손과 발이 잘린 몽둥발이가 된 기분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버지와 비슷한 노인을 보면 눈물이 났다. 봇물이 터진 것처럼 슬픔이 밀려와 헤어나기 어려웠다. 세상에 영원히 버려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나를 안고 밤길을 달리던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떠올랐다. 어른이 되고 한참을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기억이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만큼 아버지는 밤길을 달리고, 달리셨다. 차가운 바닷바람도 산바람도 아버지의 등 뒤에서는 유순해졌다. 홍역도 무섭지 않았다. 내가 대신 막아 주마. 아버지의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가 떠나고 나를 지켜주던 보루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세상의 바람과 파도를 혼자 힘으로 온전히 견뎌야만 했다.
“내가 대신 바람을 막아줄게 잠시 피해 있거라, 그리고 세상으로 향할 용기를 다지고 나아가거라.”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셨다. 어린 자식들과 아내를 지키고 자신의 인생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용기를 잃지 않으셨고 조금의 두려움이나 주저 없이 등을 내미셨다. 그에 반해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등을 그리워하는 한없이 서툰 자식이다. 그래도 이것 하나쯤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날의 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뛰셨던 것처럼 나도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마냥 철없는 어린 딸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당당히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삶에 한없이 충실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아버지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응답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립고 그리운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