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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Aug 04. 2022

당신의 삶이 관세음보살의 자비 안에 있기를

무위사 수월관음도

우리는 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만나지 않고도 깊은 공감에 닿을 수 있다는 걸 당신을 통해 알았습니다.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곳 각자의 삶을 사는 데도 말입니다.      


당신은 오랜 일터를 퇴직하고 이제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낯선 곳에서 낯선 이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셨지요. 출신지도 모르고 안전모의 색깔과 크게 붙여진 이름과 작업복에 드러난 소속만으로 구분되는 사람. 저는 당신의 글을 통해 사계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엔 마스크와 보안경을 쓰고 숨을 쉬면 안전모 하단에 고드름이 맺혀 그 강도로 추위를 가늠한다고 했습니다. 여름날 상부에 오르면 습기와 열기가 더해져 안전고리 체결조차 까먹는 아찔한 순간이 발생한다고도 했습니다. 벽과 바닥을 제외하면 온통 철판이나 쇠파이프로 이어진 작업공간, 엘리베이터는 없고 300인승 골리앗은 행렬이 길어서 한번 놓치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380개가 넘는 계단을 몇 번씩이나 오르내린다고 하셨지요. 발톱을 뭉그러뜨린 안전화의 고통을 떠올릴 때는 제 발도 화상을 입은 듯 저렸습니다.


연금생활자의 삶을 넘어 다시 현장을 선택한 당신. 당신의 발걸음은 언제나 멈추지 않더군요. 집에 있을 때조차도요. 일하고 돌아오면 방구석에 충그리고 옴짝달싹 하지 않는 저와는 달랐습니다. 당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강진 무위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글자만 풀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무위를 연관시키는 것이 이상하겠지요. 그런데도 계속 무위사가 떠올랐습니다.      


 매일을 분투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당신이야말로 무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위는 가만히 앉아 무위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행동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無爲之爲)’ 라고 합니다. 저는 당신이 그 무위의 위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의 시선이나 명분이 아니라 당신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당신 자신으로 보였습니다. 무언가 강렬한 생의 불꽃이 자기 안에 있어 삶을 이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위사는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를 행한 사찰이었던 만큼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를 원하는 이유는 극락보전의 벽화 때문입니다. 벽화에는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승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 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습니다.    

  

수월관음도는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관음보살의 표정이 다릅니다. 그런데 또 어디에서 보든 관음보살의 시선이 나를 따라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자리에 있든 관음보살이 나를 굽어 살피며 자애의 눈길을 준다는 믿음에 사로잡힙니다. 햇살 속 환한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어둑한 심연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눈동자가 없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그윽하게 선재동자를 내려다보는 관음보살, 천 개의 눈과 귀와 손으로 중생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관음보살. 우리의 삶이 관세음보살의 자비 안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위험한 현장에서 내딛는 발걸음을 하나하나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쉼 없이 앞으로 내닫는 당신의 고단함도, 마음의 빈자리도 위로해 주기를 빌어봅니다.      


 무위사 여행을 끝나고 난 다음에는 백련사에 들르면 좋겠습니다. 만경루 마루에 올라 구강포를 바라보고 있으면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생이 충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멈추어 서서 풍경에 잠겨 있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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