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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Aug 02. 2022

여성의 이름으로 세상에 발자국을

-덕숭산 수덕사

   

 넷플릭스에서 <설득>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을 극화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앤 엘리엇은 무일푼인 가난한 해군 프레드릭을 사랑했으나 미래가 없는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주변의 설득으로 헤어지고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8년 후 프레드릭은 성공한 채 돌아오고 둘은 오해와 자존심 때문에 어긋나지만 진심을 알리는 프레드릭의 마지막 고백에 사랑을 되찾습니다. 소설을 따라가지 못하는 영화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영화 속 대자연의 풍광은 너무 아름답더군요. 영화는 이렇듯 해피엔딩을 보여 주지만 실제 그 시절 여성 작가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 중류층 가문의 여성들은 유산이 많은 남자의 아내가 되어 부유하게 살거나, 아니면 남자 형제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거나, 가정교사가 되어 말썽꾸러기 귀족 자제들을 돌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런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그들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설탕물로 연명해야 했고, 불기 없는 방에서 밤새 한기에 시달리며 백지 위에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만성적인 손가락 관절염과 근육통에 시달리며 노예처럼 글을 써도 가난을 벗어나긴 힘들었고요. 조르즈 상드는 여성의 이름으로 세상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을 수 없어 남자 이름과 복장으로 파리를 누볐습니다. 그녀에게는 매춘부, 마녀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지요. 제인 오스틴은 책을 내면서 By a Lady라고 저자의 이름을 명기했습니다. 그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 최고의 시인인 허난설헌은 조선에 태어난 것, 여성으로 태어난 것,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표현하면서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신음하다 27세에 요절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에도 이런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김일엽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수덕사를 갈 때마다 저는 그녀가 기거했던 곳을 다녀오곤 합니다. 예산 수덕사는 많은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견성암, 환희대, 금선대 등이 그곳입니다. 이곳 암자들은 일엽, 만공, 경허스님 등 근현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입니다. 일엽 스님은 개화기 신여성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었습니다. 이화학당을 나와 일본 유학길에 나서고 진보적인 행동과 필설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성을 창간했고 최남선보다 앞서 신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가장 앞선 길에 섰던 그녀는 1933년 덕숭산 수덕사의 암자로 들어갔습니다. 김일엽이 불교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성욱 박사와의 사랑이 관련 있어 보입니다. 백성욱이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그녀도 이후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까요, 스승인 만공 선사는 선 수행을 위해 말과 글을 끊으라고 했고 그녀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수행을 이어갑니다. 그녀가 세상을 향해 말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시대의 금기에 도전하며 가는 곳마다 논쟁을 일으켰던 대표적 신여성. 사랑에 서슴지 않았던 그녀. 파란만장한 세월을 등지고 절로 들어간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종교는 현실도피의 선택이라 여기며, 세상과의 대결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다 결국 속간을 넘어선 그녀의 마음길을 헤아려 봅니다. 수덕사 대웅보전 주심포 건물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측면 벽의 텅 빈 충만이 당신을 가득 채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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