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에 걸렸습니다.
여기 줄 보이시죠? A형 독감이네요.
지난 주 금요일 밤, 갑자기 목이 간질간질하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며칠간 찬 바람을 대책없이 맞은 탓인가보다 생각하고 가습기에 목 수건에 모든 걸 갖춰놓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몸살기운이 시작되었다. 토요일은 남동생이 군에서 영외면회를 나오기로 해 온 가족이 수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몸살기가 약간 있는 것 같았으나 심한 것 같지 않아 약국에서 사다둔 종합 감기약을 먹고 집을 나섰다.
가족끼리 다 같이 점심을 먹을 쯤부터 증상은 심해졌다. 온 몸이 떨릴만큼 춥고, 머리가 어지럽고 두드려 맞은 것 처럼 아팠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곧 이게 별거 아닌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눕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씻는 시간이 지옥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저녁 7시쯤 잠이 들어 다음날 오전 8시에 눈을 떴다.
몸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팠다. 거의 울면서 병원에 갔다. 일요일이라 집 근처 병원은 열지도 않아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열을 재더니 "열이 있네요. 38도 정도. 독감검사를 해야겠어요."하고 내 코에 기다란 막대기를 마구 쑤셔넣었다. 얼얼해진 코를 붙잡고 5분 정도 대기하니 결과가 나왔다. 검사기에 a라고 적힌 곳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독감이었다. 난생 처음 걸리는 독감.
독감이라는 말이 청천벽력같이 들리긴 했지만 그건 진단을 받는 순간일 뿐이었다. 곧바로 드는 생각은 달랐다.
그럼 회사 못 가겠네.
그래. 중요한 건 안가는게 아니라 못 가는거. 독감은 감기몸살과 달리 내가 내 한몸 불사르겠다고 아파도 참고 출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기왕에 아픈거 회사를 못 가게 아픈게 낫지 않은가.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5일간 타미플루를 먹는 대신 30분간 페라미플루 수액을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주사가 제일 효과가 좋다고, 집을 나서던 나와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열감은 있고 으슬으슬 떨렸지만 두드려 패는 것 같은 근육통이 느껴지게 줄었다.
일단 다시 침대에 누워서 대표님께 카톡을 보냈다. 독감 확진을 받았습니다. 페라미플루를 맞아서 격리기간을 줄였지만 완전히 해열이 되기 전까지는 전염될 수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 내일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의 한숨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어쩌겠는가. 독감이라는데.
그렇게 나는 남들이 울면서 출근하는 월요일인 오늘 집에서 이렇게 쉬고 있다. 약간의 미열은 남아있지만 몸상태는 많이 좋아졌고, 글쓰고 책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읽고 싶었던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으며, 퇴사하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하루 종일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잠이 오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고. 단 한 번도 흔히 말하는 '막 살아'본 적이 없어 그런지 독감에 걸려 혼자 침대 위에 있는 신세가 꼭 내 맘대로 막 사는 것 같고 자유롭다. 행복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때 되면 또 나름대로 이 삶이 지겨워진다는 것은 안다)
몸이 아프고서야 이렇게 마냥 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니. 주말마다 난 뭐그리 아둥바둥하면서 무언가 해야된다는 강박에 짓눌렸는지.
아픈 것을 핑계로 퇴사 체험을 하고 보니 퇴사까지 남은 두 달 반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 그 두 달 반 동안 해야 할 일도 산더미이고...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니 그만두고 마저 책이나 읽다가 잠들자.
20200120 예비백수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