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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손주! 최고의 행복한 날들, 최고의 선물.

삶의 이야기들

by 정달용

[13. 손주! 최고의 행복한 날들, 최고의 선물]


부스럭 거림에 눈을 떴다. 손녀가 넓은 거실에서 둥글둥글 굴러다니며 잠을 자다 나를 건드린다. 살며시 안아주려니 답답한 듯 어느새 저리 굴러 달아난다.


아직 어둠이 짖게 드리워진 새벽 4시, 하루 전이었던 어제 이맘때는 빗소리에 눈을 떴었다. 세차게 내리는 여름 장맛비는 좀체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마치 우박 쏟아지듯 아파트 난간을 부딧치고 있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골 모팅이 논이 걱정이 되었다. 이후로 내리다 말기를 반복하던 비는 어제 오후가 되어서야 온순하게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뜬 지금 밖은 조용하다. 도심은 조금씩 어둠으로부터 빛이 드리워지고 비가 그친 새벽을 여름철 매미가 어둠을 쫒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곁에서 새근새근 잠자는 손주를 바라본다.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천진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손주의 환하게 웃는 모습, 그건 삶의 보약이었다. 그건 최고의 행복이었다.


이 밤이 새면 이 손주는 다시 제 살던 곳으로 가야 한다. 나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40여 일 전,

두 돌이 되어가는 손주는 제 엄마와 같이 인천공항에서 근 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딸이 방학을 이용해 손주도 제 할머니, 할아버지도 뵐 겸, 손주에게 한국말과 한국환경도 익힐 겸 입국했다. 손주는 1년 전 할아버지가 기억이 나는지 환하게 웃음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그때부터 떠나는 지금까지 손주는 내 삶에 최고의 행복이었다. 비록 이제 갓 두 돌을 지난 손주를 보느라 그동안의 자신의 삶에서 멀어졌던 아내, 할머니의 역할을 하려다 보니 웃는 때와 힘겨운 때가 순간순간 바뀌고 자신의 평범한 생활이 없어졌지만 대신 그 몫은 내가 누렸다.


퇴근길에는 버스정류장에서 손주가 기다리다 환하게 반겨 주었고, 중년의 두 부부가 사는 텁텁한 집안엔 생기가 돌았다. 집안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손주와 온 가족이 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왔던 40여 일 전에는 자신의 의사만 표시하던 손주가 이젠 웬만한 의사 표현은 하고 대화를 하는 상태가 되었다. 하물며 제 할아버지는 밀당의 대상이 되었다. 한번 안아주려 하면 "no!"라고 단호히 말하며 고개를 쌀쌀하게 돌린다. 때로는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쁜 내 손주다.

나는 손주가 오기를 기다리며 나름 내 계획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일까?라고 생각을 해 봤다.


요즘은 형제들이 거의 없다. 형제들이 없다 보니 한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는다. 너무 귀엽게 키우다 보니 나눔을 모르고 자신만을 아는 이기주의에 길들어져 자란다. 부모와 자식의 단순한 자리이고, 많은 어린이가 부모의 이별로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며, 따라서 삭막하게 자란다.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외롭게 자란다.


11살 되던 해 세상을 뜨신 나의 부친, 그 공백은 자라는 나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었다. 따라서 내 손주에게는 정서적으로 포근함을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심어주고 싶었다. 고민 끝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옛날옛날 호랑이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 100년 묵은 여우 이야기, 의좋은 형제 이야기 등등...

내가 어렸을 때 옆집에 마실 가서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우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웠고 정서적으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내 손주에게도 그런 것들을 가슴을 심어주고 싶었다, 틈나는 대로 유튜버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살배기 손주는 그런 옛날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너무 어리고 1년 정도 지난 내년 이맘때나 들려주어야 되겠다.


또 하나는 동요를 불러주고 싶었다. 지금 내 나이쯤 되는 중년들에겐 언제라도 불리어지는 노래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반달과, 가을밤, 섬집아기, "뜸북뜸북 뜸부기 논에서 울고"라는 오빠생각, 이들의 노래를 기타와 함께 불러주고 싶었다. 멀리 이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딸 부부와 손주, 이들에게 이와 같은 동요는 자신의 뿌리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고향이 그리워지면, 제가 낳고 자랐던 고국이 그리워지면 생각나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고향의 품이었다. 그것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기타만 들면 제가 치겠다고 빼앗아간다. 그것도 조금은 미루어야겠다. 그것은 나중에 하면 된다. 우선은 두 돌 지난 손주의 이쁜 모습이 우선이다. 이 모습도 잠깐인걸...


지금도 손주는 넓은 거실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러다니며 잠을 잔다. 이 잠이 깨면 멀리 이국으로 떠나야 할 참이다.

70을 바라보는 내 삶에서 최고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따라서 손주는 나에겐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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