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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할아버지 놀부, 나는 흥부!"

삶이란?

by 정달용

3. "할아버지 놀부, 나는 흥부!"

또 한 가지 손주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옛날이야기"였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유튜버에서 단절된 부분을 메워가며 좀 더 재미있게 얘기를 역어 가려했으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일에는 퇴근하고 식사 후 헬스장을 가기 때문에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손주를 "옛날이야기"로 유도하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계획을 염탐한 아내가 "싸우며 정든다"라고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것을 기회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손주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제 할아버지한테 장난을 친다. 이야기 속의 그 장면이 손주에게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시골 내가 살던 집


나는 내가 11살 되던 정월에 나의 부친이 세상을 뜨셨다. 바로 초등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2~3월의 경계점인 봄 방학 때였다.

위로 딸이 둘이었던 누나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짝지어주는 대로 시집을 갔고, 큰 형님은 군 복무를 할 때라 우리 집안의 앞날은 예정이 되어 있었다.

1967년 곡식을 바쁘게 거둬들여야 하는 가을에 몸에 이상이 생겨 감기로 알았던 통증은 심해졌다. 부친은 이인에서부터 공주로 대전으로 마지막엔 서울로 몸을 치료하러 갔으나 의사의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시골로 내려와야 하셨다. 차가 없어 리어카에 솜이불을 깔고 덮고 한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오셨다.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부친은 그때의 의술로는 병명도 모르던 지금의 대장암, 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견디시며 흥얼거리시던 모습, 노모와 처, 그리고 아직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한탄의 소리, 그것은 어느 판소리의 슬픈 가락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7살 어린 나이에 아비 잃은 철부지 아들과 27살 젊은 청춘에 남편 잃은 여인의 삶, 이 운명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맞서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나의 부친은 당당히 일어섰다.

4년 전에 102세로 세상을 뜨신 나의 노모와 인연이 되어 억척같이 일한 덕분에 먹고살만한 살림살이와 슬하에 6남매의 자식을 두었지만 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떠나셨다.

막내인 나는 어린 나이에 우리 집안의 애환을 생생하게 보고 성장했다. 이후 조금씩 철이 들어가면서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나 세상은 나 하나의 삶을 건사하기에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어려 임시 모셨던 마을 뒤 아버지의 산소, 수십 년이 흘러 대대로 조상의 땀이 배어 있는 땅 음말 밭으로 모실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모태의 땅에 모신 할아버지, 아버지 산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유골은 많이 남아 있었다. 마을 일꾼들이 유골을 수습해 나에게 모시고 가라 넘겨줬다. 마을 뒷산에서 부친의 유골을 모시고 혼자 내려오며 이승과 저승의 이어 짐이랄까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그 감정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내 어깨에 메고 가는 이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 11살 되던 해에 이별하고 그리워했던 나의 부친이라 생각하니 마음속에서는 온기가 다가왔다. 정자나무를 거쳐 새마골을 지나 궉때기의 입구에서 잠시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었다.

나는 6남매의 막내였지만 나의 부친은 형제가 없는 7살 어린이에 불과했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오로지 땀으로만 땀으로만 논과 밭을 일구어 4개 부락에서 재산이 몇째 안에 드는 가정을 만들었고, 노모와 처, 그리고 6남매가 살아갈 보금자리로 집을 손수 지으셨으니 대단한 나의 아버지였다.

내 아주 어렸을 때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뒷집 대보는 나의 동갑인 ㅎ택이를 데리고 부여 어느 곳에 시제를 갔던 때이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나는 졸리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쪽다리에서 버스를 내려 달밭으로 가는 시골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달밭으로 들어서는 두리봉에서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혔다. 그때의 아버지의 따뜻한 등은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내가 아버지의 등에 업혔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롯 온기가 없는 유골상자지만 내 품에 안아보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내가 이루어야 할 일 중 하나인 "아버지 산소"의 이장은 부자간에 상봉을 하고 마무리되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하여 집 앞에 도착했다. 혼자 생각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주는 뛰어 오면서 "할아버지!" 하고 나의 품에 안기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손주는 긴 장난감을 손에 쥐고 크게 휘저으며

"어서 썩 물러가거라!"

라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제 할아버지한테 호령을 한다. 마치 많은 식솔들을 거느린 흥부가 제 형인 놀부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때 "어서 돌아가라"라고 호통치는 놀부의 모습이라.

세상에 이런 불효한 놈이 어디 있나?

이런 손주를 꼭 안아준다.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는 제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손주에게 할아버지는 놀부가 되어있었다.

"할아버지 놀부!, 나는 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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