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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수나무와 섬집아기

삶이란?

by 정달용

2. 계수나무와 섬집아기

작년 여름방학 때 딸과 손주가 올 때는 나름 할아버지로써 자라는 손주에게 무엇을 심어줄까? 고심하다 내가 어렸을 때 부르던 우리 민족의 노래 동요를 가르쳐 주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이제 기어 다니다 겨우 걸음을 배우는 손주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내년에 오게 되면 가르쳐 주어야겠다.

"엄마가 섬 그늘에..."의 섬집아기. "푸른 하늘 은하수"의 반달, "뜸북뜸북 뜸북새"의 오빠생각, "가을밤 외로운 밤"의 가을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마주한 딸과 손녀.

손주는 1년 전의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억이 나는지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렇게 두 달 남짓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부부의 밋밋한 생활에서 갑자기 바뀐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딸은 제 과제를 하느라 바쁘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아빠가 손주를 봐줘야 돼"라고 했지만 그동안 쉬던 나는 딸과 손주가 오기 10여 일 전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손주를 보는 일 대부분은 아내의 목이 되었다. 초기의 할머니와 손주 관계는 수시로 냉전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나는 삶에 생기가 돌았다. 아침 출근길에는 잘 다녀오라고 품에 안기는 귀여운 손주가 있었고, 퇴근길에는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하면 길 건너편에서 "할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손주가 있었다.

이 손주에게 나름 선별한 4개의 동요를 불러 주기로 했다. 미국에 살더라도 너의 가슴에는 한민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심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이 동요를 들으면 같이 따라 부르게 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노래들, 이 노래들은 민족의 노래 아리랑과 같이 한민족의 가슴속 어디엔가에 심어져 있는 민족의 혼이었다.

할아버지가 바라는 손주의 성장하는 모습 중 그런 것들이 가슴깊이 심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덕분에 손주는 가르쳐 준 노래를 제법 잘 부른다. 때로는 밤늦게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엄마가 섬 그늘에~"를 들으며 할아버지 등에서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을 보면 "제법 내 최면이 먹혀들었구나!"싶어 행복함이 든다.

또한 종종 놀이터를 데리고 가도 핸드폰으로 이 노래들을 틀어줬다. 가슴속 깊이깊이 담아주기 위해서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아련한 어린 시절의 모습들과 고향생각이 떠오른다. 오히려 내 마음이 순화됨을 느낀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초로의 사나이! 손주가 있다는 것이 나를 50, 60년 전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고, 훌쩍 가버린 세월 속에서도 기억 속의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항상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어쩌다 한 번쯤은 고향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보는 여유가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그것은 삶의 보약이다.

손주는 종종 "계수나무"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로 2절까지 불러준다.

어느 날 손주와 나는 또 그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손주에게 들려줬다.

"저 달 속에는 계수나무가 한 그루 있단다. 그 나무 밑에 토끼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 계수나무 잎을 먹고살지"

"반달"이라는 제목보다는 계수나무가 손주에게는 깊이 각인된 모양이다. 그래서 손주는 "반달"이라는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계수나무 불러 달라고 말한다.

핸드폰을 끼고 태어나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하면 저 할아버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비록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속 이야기 일지리도 내가 그릴 수 있는 곳, 갈 수는 없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지 않을까?

2, 3년이 지나면 헛된 것이라 들통이 날지라도 동화 속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고,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리워지는 고향의 모습과 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은 자신에게 좋은 추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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