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4
일찍 서둘러 온 여름은 토요일과는 상관없이 이른 아침부터 심신을 피곤하게 한다.
텁텁한 공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할 토요일의 하루가 결코 녹녹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평상시 내가 보내는 토요일은 보통 수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과 시골에 심어놓은 소나무를 가꾸고, 할아버지, 아버지 산소를 돌보는 일 등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런데 딸과 손주가 오고 나선 우리 부부가 하던 일은 자연스레 어두운 골방 구석에 처박아 둬야 했다. 손주가 왔는데 어찌 감히 둘레길을 가고 시골을 내려간단 말인가?
"손주를 봐야지!"
어느새 우리 부부는 자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직장을 나가니 조금은 낳았다. 아내는 할머니 노릇을 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평상시 오는 토요일과 다름없이 똑같이 왔다. 그런데 나나 아내에게서 느끼는 토요일의 느낌은 크게 달랐다.
아침부터 후덥지근하니 아침 같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손주는 우리의 토요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어제와 같이 저하고 놀자고 한다.
요즘은 아이를 적게 낳는 편이라 함께 놀 사람이 없다. 따라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빠, 엄마들이 없는 형제들의 역할을 해야 되는 처지다.
나도, 제 할머니도, 또한 제 엄마도 시큰둥하니 네 살 백이 손주도 이전의 쾌활한 모습은 어디 가고 침울해 있다. 못된 더위는 어느 누군가 한 명에게만이 아닌 모두에게 저기압을 내렸다.
집안 분위기도 축 처져 있다.
"눈치 없다"는 말을 결혼 이후 귀에 박혀 살아왔는데 나는 손주에게 놀이터에 가자고 일어섰다. 손주는 놀이터에 가자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리 만치 좋아한다. 나는 손주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나는 허리가 성치 않아 어린 손주지만 안고 있기가 힘들다. 그래서 팔로 안는 대신 등에 업히는 것이 내 방식이다. 손주도 여태껏 보지 못한 특이한 모습에 저도 좋아한다.
손주를 등에 업고 놀이터에 갔으나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놀이터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태양은 이글거리며 머리 위로 올라오고 손주는 좋아하는 그네를 타다 금세 싫증이 났는지 금붕어 보러 가자며 등에 업힌다.
오늘은 등에 업힌 손주 하나도 벅차다. 금붕어 보는 것도 잠시, 무더운 기온에 재미가 없는지 집에 가잖다. 손주를 등에 업고 조그만 연못을 나서는데 손주는 낮고 속삭이듯 말한다.
"할아버지, 사랑해!"
엑!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아버지 안 좋아해!"가 흔히 듣던 말인데...
"요놈이 속이 훤하네! 할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나온 상황도 훤히 알고 있구나!"
손주의 그 한 마디는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자 물결이 원을 그리며 멀리 퍼져 나가듯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그 소리는 요즘 흔하디 흔한 "사랑한다"란 말하고는 달리 들렸다.
앞으로도 그런 깊이 있는 "할아버지, 사랑해!"를 들을 수 있을까?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는 쉽게 쓸 수 없는 고상한 단어로 생각했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주변의 "사랑한다"는 "좋아한다" 정도의 표현으로 내 귀에는 들린다.
밥 먹다가도 "사랑한다". 서로 싸우고 돌아서서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또 "사랑한다"라고 했는데 "사랑한다"는 답변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또 그것 때문에 싸운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냐? 고.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사랑한단 말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자식을 키울 때 날림으로 키운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자신할 만큼 나도 많은 정성을 가지고 키웠다.
내가 한 4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그때가 딸이 고등학교 정도 다닐 때 인가보다. 어느 날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으려다 무심코 뒷 벽에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액자에는 지금 손녀 정도의 나이가 될 듯한 딸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있었다.
"저렇게 예쁜 적이 있었던가!"
언제부터 저 사진이 걸려 있었지?
벽에 걸린 사진은 수년을 그 자리에서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딸이 시집을 가고 사위가 생기자 어쩌다 "아버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머쓱해진다. 나도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마지못해 군대에서 복창하듯이 어색하게 "사랑한다"를 따라 하든가 그냥 웃고 만다.
그러데 손주가 "할아버지, 사랑해!"라고 하면
나는 바로 "사랑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왜 할아버지는 사랑한다고 말 안 해?"라고 따질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손주를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