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다가 죽다
만나기만 하면 ‘사는 게 뭔지, 왜 사는 건지’하는 제법 심오해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친구가 있다.
하지만 거기 까지다. 본인이 갖는 이런 의구심에 대한 어떤 깊이 있는 고민이나 사색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냥 입버릇처럼 돼 뇌일 뿐이다. 생각의 얕음을 흉보거나 지적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
해답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음에도 이런 물음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뭘까?
“인간에게만 삶이 완성해야 할 과제로 주어진다.”
폴 투루니에가 쓴 ‘노년의 의미’라는 책에 나오는 한 줄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삶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것이다.
숙제를 미루다가 개학을 앞둔 학생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어떤 역할을 갖고 태어났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맡은 배역은 대본에 충실한 것인가? 작가는? 연출자는? 배역은? 무대는? 관객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 역할이 커다란 장독 항아리가 아니라 조그만 간장 종지라서 불만은 없다.
아니 외려 적절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들의 연기와 나를 포함한 이야기 줄거리, 내가 선 무대 모두가 갑자기 낯설다.
강렬한 조명 너머 어두컴컴한 객석에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들은 또 누구인가?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는 이대로 좋은가? 행여 내 연기가 대본을 벗어난 건 아닌지? 아니 어쩜 처음부터 다른 배역, 다른 대본을 따라한 건 아닌지?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실존적 공허’가 이런 건가?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19쪽)
그렇구나!
은퇴는 사회로부터의 거리 곧, 공적 업무와의 결별이다.
기업인으로 서의 책무도, 대학 교수로서의 가르침도 이젠 자유롭다.
문제는..
‘완성해야 할 과제’
‘이 아름다움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그렇다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영적인 일이어야 한다.
남에게 물어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니
비로소 무심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홀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