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넌 너답게 살거라
이 말은 얼핏 듣기엔 ‘니 맘대로 하거라’ 혹은 ‘내 알바 아니다’식의 무관심이나 체념,
심하게는 포기로 드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속은 ‘난 나답게 살지 못했으니 너라도 너답게 살아 보거라’는 격려와 응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연 ‘나 다움’은 무엇일까? 왜 나는 나답게 살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젊은 너는 얼마나 하고 싶은 삶을 못 살았길래 그렇게 매몰찬 선언을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이런 외침이 어제오늘도 아니고 한 두 가지도 아니다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미움받을 용기’…
언제부터 인지 이런 류의 독립 선언문이 꾸준히 있어 왔다.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일까?
내 생각엔 1980년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이 그 분기점이지 싶다. 이 책에서 저자는 ‘탈 대량화(demassification)’라는 신조어를 사용한다. 산업 혁명 이후 생상성을 지탱해 온 ‘대량’이 한계점에 다 달았음을 예고한 것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단순화, 표준화, 전문화라는 소위 3S(simplification, standardization, specialization)가 불가피하다.
특정 개인은 사라지고 불특정 다수의 집단 만이 요구된다.
배울 사람은 학교로, 아픈 사람은 병원으로, 일할 사람은 사업장으로… 유니폼 같은 양복이나 작업복, 구내식당, 출입증, 모두가 획일적이다.
그러던 것이 정보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개인화가 드러나고 대량은 위력을 상실해 간다.
새롭게 등장한 IT 기술은 예전보다 더 많은 걸 만들어 내도 각각 다르게 만들 수 있기에 이르렀다.
소위 ‘남과 다르면 안 되는 세상’에서 ‘남과 같으면 안 되는 세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근길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돌아가서 갈아입고 나올 지경이 돼 버렸다.
바야흐로 생산성이란 이름으로 압류당했던 정체성 회복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X, Y, NZ에 이어 알파 세대에 이르기까지,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에서 각종 이념과 세대 간의 편 가르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해체는 획일로부터의 탈피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얼핏 국론이 삼분오열되고 집안이 콩가루가 되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는 생산성의 미명 하에 모였던 집단주의 멀게는 단일 민족의 굴레 안에 갇혀 던 나의 재발견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넌, 너답게 살아 보거라.
나도 오늘부터는 나답게 살아보마… 하나 나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너로부터 분리된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