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인가 간섭인가
나이가 들면 변하는 건 노화인가? 치매인가?
진보가 보수로 변하는 경우는 흔해도 그 반대는 보기 드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쉽게 예단할 일이 아니다. 더욱 힘든 건 학계나 종교계의 ( 한때는 본으로 삼았던 이들의) 변절이다
피 토하는 심정으로 개혁을 외쳐대던 사람들이 수구적 자세로 변하는 건 당사자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젊은 시절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한평생 살아온 난 어쩌란 말이냐? 난 그렇게 되질 않는데.. 아직 덜 늙은 걸까? 아님, 고지식한 걸까?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어느 한 편으로 몰리더라도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게 침묵하는 것보다 옳은 일일까?
옳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평소 ‘나는 옳은가(right)?’를 자문하며 살아왔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정상인가(normal)?’로 스스로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바뀐 걸 감지한다. 어느 외국 학자가 촉발시킨 공정에 관한 논의만 해도 그렇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사람들은 누구도 아무에게 비뚤어졌다고 지적할 수 없다.
스스로를 지성인은 못되더라도 학력상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것마저 부인할 생각은 없다.
지식인이 됐건 전문가가 됐건 하나같이 침묵하는 데 대해 답답하고 못 견뎌한 적이 있다. 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며 “떠들고 장난친 사람 앞으로 나와!”할 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정적을 못 견뎌 몇 번이고 일어서려던 충동을 참았을 때의 기억처럼. 하지만 기억의 오류를 떠올리면 정작 떠들고 소란 피운 사람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른다. 해서 어쩌면 침묵하는 건 비겁한 게 아니라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정당화에 이른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서양인들이 쳐들어오자 이제 자신들의 시대는 끝났다며 숲 속으로 사라졌듯이 말이다.
농업사회는 이미 끝났는데 농사일에만 익숙했던 할아버지의 ”바람 분다. 빨래 걷어라! “는 단호한 외침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포털의 일기예보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잔소리조차 못된다. 지식 반감기가 짧아질수록 앞 세대의 경험은 용도폐기 처분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러려니 하다가도 못내 서운함이 감돈다.
어떨 때는 섭섭함을 넘어 노여움에 이를 때도 있다. 예전에는 전혀 짐작도 못 해 본 감정이다. 이제라도 노인 심리학 책을 펼쳐봐야 할까? 아무리 허리가 곧고 머리에 염색을 해도 65세면 노인이다. 그걸 부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때론 존재감마저 부정당하는 듯싶어 아니 당혹스럽다.
에어컨이 지천인 오늘, 고목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휴식처가 아니라 치워야 할 낙엽만 쌓아놓는 귀찮은 존재인가? 이 시기가 지나면 서양처럼 ‘따로 또 같이’ 세대 간 격차를 넘어 공존하는 세상이 올까? 그때가 비록 내 당대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어우러지는 시대를 향한 과도기라면 견딜만하다.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불현듯 이 땅의 뿌리 깊은 수직 문화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은 이 생각 또한 노파심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