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편 – 그 겨울, 작은 방 한 칸
천진 남개대학 호수옆 강의실 (天津南开大学 호수 강의실건물 )
1년 넘게 천진을 떠나 서울에 있다가 98년 9월 초 다시 공항에 도착하니, 천 스푸(천 기사) 아저씨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입학 후 알게 된 학교 출입 택시기사를 하고 있던 천 스푸에게 한국에서 미리 연락을 해 둔 상태였습니다.
천진공항은 시내로 연결되는 버스가 없어, 거의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아저씨는 내가 사별한 것을 모르십니다. 그냥 방학이라 한국에 갔다가 돌아온 걸로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개강인데 조금 늦게 왔네.”
그 말에 나는 “집에 일이 있어서 좀 늦게 왔어요.”라고 대답했고, 순간 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혹시나 백미러로 내 얼굴이 비칠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창밖의 천진은 여전히 회색빛, 칙칙한 도시였습니다.
학교 기숙사에 도착해 간단히 짐을 푼 후, 지도교수님께 도착했음을 전화로 알렸습니다.
교수님은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집을 구하고 정리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개대학 기숙사는 다른 천진의 대학보다 비싸서, 2인 1실에 1인당 하루 5불~7불 정도였습니다.
학교 밖 원룸식 아파트는 월 100불 정도였기 때문에, 기숙사보다는 외부 거주를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시멘트로만 골조를 올린 6층짜리 계단식 아파트였습니다.
95년도 처음 천진에 갔을 때는 ‘핑방(平房)’이라 하여 학고방처럼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선 낮은 집들이 많았는데, 그걸 허물고 이렇게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 기본 구조만 완성한 상태, 즉 시멘트로만 마감된 상태로 분양합니다.
그래서 한국처럼 인테리어가 획일적이지 않고, 집집마다 구조와 마감이 다릅니다.
서민 대부분은 시멘트 바닥 위에 회벽을 바르거나, 침대만 놓고 살기도 했습니다.
타일을 바르거나 흰 석회로 마감한 집은 ‘깨끗한 편’에 속했습니다.
대학교 안에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함께 있고, 교수 아파트, 시장, 식당, 작은 상점까지 있어 외부에 나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거주 형태가 무척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안에 집을 얻고 싶어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습니다.
벽보에는 “00짜리 집과 교환합니다”라는 쪽지들이 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집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맞바꾸는’ 거래라고 했습니다.
학교 내 부동산에 가니, 집을 보려면 무조건 200원을 선불로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올 때까지 보여준다는 말은 있었지만,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진 않았습니다.
계약을 하게 되면 한 달치 집세에 해당하는 중개 수수료도 지불해야 했습니다.
가본 집들은 “가전 가구 있음”이라 했지만, 대부분은 버려야 할 것 같은 침대, 고장 난 듯한 세탁기, 쓸 수 없을 것 같은 낡은 의자들이 있었고, 몇 년간 청소 한 번 하지 않은 듯 더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마오피방(毛坯房)’이라고 하여, 시멘트 벽만 발라놓은 빈집도 있었습니다.
결국 학교 밖에서 집을 구하기로 하고,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산다는 안산시 따오(鞍山西道)로 갔습니다.
노천시장이 있는 큰길 옆으로 주택들이 있었고, 근처에는 천진중의대학이 있어 매년 200명의 한국 유학생이 입학한다고 들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한국 학생들이 보였고, 한국말이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나는 6층 건물의 5층에 있는 방을 얻었습니다.
전용 30㎡ 정도 되는 방 하나에 부엌, 화장실, 그리고 작은 식탁 공간까지 있는 구조였습니다.
가전이나 가구는 전혀 없었지만, 열수기(전기온수기) 하나가 설치된 빈집이었고, 앞이 트여 있어 햇살이 잘 들고 환했습니다.
맞은편 1층에는 작은 구멍가게 ‘시아오마이부(小卖部)’가 있었고, 골목을 지나면 바로 시장이 있어 장보기도 편했습니다.
집주인은 4층에 살고 있었기에, 고장이나 문제가 생기면 바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 달에 700위안, 한국돈으로 7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6개월치 집세와 한 달치 보증금을 포함해 7개월분을 내고 계약했습니다.
계약을 하고 보니 아래 2층에 내 박사반 입학 동기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집을 정한 뒤, 찬이 엄마에게 연락해 전에 맡겨두었던 짐을 가지러 갔습니다.
살림살이는 다 정리되어 책들만 남아 있었고, 그 책들을 한 권 한 권씩 꺼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 책을 사서 읽을 때는, 지금처럼 혼자가 된 나를 상상하지 못했는데…”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이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없이 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필요한 생필품을 사 들고 5층까지 오르는 일은 힘겨웠습니다.
6층에 사는 노부부는 무거운 짐도 가볍게 들고 올라가는 모습이었고, 그런 모습이 부럽고 신기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집에서도 신발을 신거나 슬리퍼를 신는 문화라, 시멘트 바닥 그대로 살아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신발을 벗는 문화라, 나는 장판을 사다 바닥에 깔아야 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장판을 많이 찾아서 인지 장판은 근처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배달도 해주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장판을 깔고, 작은 책상과 의자, 접이식 침대를 하나 마련하니 제법 ‘나만의 보금자리’ 같았습니다.
밤에는 건너편 집에서 방 안이 보일까 걱정되어 커튼을 달기로 했습니다.
창 치수를 재서 천 집에 가서 화사한 무늬의 천을 고르고, 그 자리에서 박음질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두 폭의 커튼이 완성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작은 집게로 커튼봉에 걸면 커튼이 되니, 그것만으로도 집이 화사해졌습니다.
바닥을 걸레로 닦고, 구석구석 청소를 하며 다짐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내가 혼자서 살아야 하는구나.”
그렇게,
다시 시작된 혼자만의 천진 유학생활.
익숙하지 않은,
나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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