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그때는 아무도 지금의 아픈 네 모습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날을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2000년 1월 8일이었습니다.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은 하얗게 변했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새해였습니다.
눈이 내려서 시장바닥에서 물건 팔던 사람들은 채소 위에 담요나 이불을 덮어 놓고 들어가 버렸고 (여긴 아직도 시장에서 겨울에 과일이나 채소를 얼지 말라고 솜이불로 덮어 놓습니다. 심지어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냉장고 유리문 위에도 한여름에 이불을 덮어 냉장고 내부의 냉기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도 하지요.)
펄펄 살아서 뛰던 민물고기들도 그냥 눈이 내려서 물속에서 얼어붙다가 그 위에 하얗게 눈이 쌓였습니다.
눈이 그치면 시장 사람들은 다시 나오고 쌓인 눈을 걷어내고 채소와 얼어붙은 생선을 팔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얼은 무인데도 얼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가 하고 샀다가 낭패를 당한 적도 있습니다. 얼은 무를 얼지 않았다고 파는 중국인이나 그 말을 믿고 혹시나 하고 사는 바보 같은 향기 나 매한가지이지요.
심하게 앓고 나서 지도교수님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논문은 40% 정도밖에 진척이 되지 않았고 이렇게 써야 하는지, 이렇게 써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졸업은 아주 요원하게만 느껴졌고 마련해 온 돈은 바닥이 나기 시작하고 나는 점점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하얀 눈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학교를 향했습니다. 하얗게 눈이 내린 호숫가 옆 2층에 위치한 부총장실로 지도교수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박사반 입학을 할 때 학과장이었던 지도교수님은 그 뒤에 남개대 부서기로 승진하시면서 부총장을 겸임하셨습니다.
"교수님, 제가 지금 400여 년 전의 이 작가가 무엇을 생각하고 이 작품을 썼으며 그것을 유추해 내는 작업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실용적인 것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어법을 공부한다면 나중에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데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쓰고자 하는 이 논문이 먹고사는 것, 즉 돈을 버는 것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저는 지금 허망한 생각만 들뿐입니다."
라고 따지듯이 그렇게 하소연했습니다.
"향기야, 네 말이 맞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지. 그런데 지금 네가 쓰고자 하는 내용들은 돈을 버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차라리 돈을 벌려면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더 실질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고전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고리타분하며 아무런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걸로 생각이 들지.
그렇다면 고전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자체가 생산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단다. 그러나 적어도 네가 논문을 쓰려고 자료를 찾고 보고 분석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사유하는 동안에 네가 느끼는 희열이 있단다. 그것은 아무도 뺏을 수 없는 너만의 사유공간에서 너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만의 희열이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너는 논리적인 사고를 전개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너도 모르게 논리적인 사고력이 키워질 것이다. 그 사고력은 앞으로 네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걸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되기도 한단다.
자 봐라.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너는 무엇을 생각하니? 사람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 지금 참 잘 나간다"라고 말을 한단다. 하지만 내게도 왜 힘든 시간들이 없었겠니? 20살에 사랑하던 동생을 잃었고 손라오스(사모님을 이렇게 지칭하심)도 문화혁명 때 재산을 다 몰수당하고 우린 젊은 시절 모두 시골에 가서 10년 동안 노동을 해야 했었단다. 이것은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우리 시대의 청년이 모두 겪어야 했던 암울한 시기였었지. 그 현실에 울분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있지만 그때 우리가 희망을 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는 것이었단다.
지금은 네가 너무 아파서 다른 생각을 못할 수 있단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난 후, 몇 년 뒤에 네가 서야 할 자리에 서 있을 때, 대학 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너의 모습을 보면 그때는 그 누구도 지금의 아픈 네 모습을 생각하지 못할 거다. 단지 강단 위의 너의 모습만을 보고 평가할 뿐이란다.
사람들이 그러겠지.
향기 참 멋있다. 향기교수 정말 멋진 여자라고....
자 오늘 내가 이야기해 줄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모두 너의 판단이지. 그리고 한 가지, 지금 써온 첫 장을 8,000자 정도로 요약해서 논문을 한 편 써 오너라. 마침 다음 달에 문과대학에서 <문학과 문화>라는 논문집을 출간하는데 그곳에 실어주마. 졸업하기 전에 논문 두 편 발표해야 하는 거 알지? 물론 논문 질이 너무 떨어지면 실어 줄 수도 없단다. 알겠니?"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용기도 났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는지 방향 제시가 되었습니다.
“기운 내라, 힘들더라도 견뎌라” 등의 말보다도 “네가 앞으로 공부를 마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강단 위의 네 모습을 보고 아무도 지금의 아픈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제게 큰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래, 아무도 지금의 초라한 내 모습을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할 거야.
그런데 교수님 말씀처럼, “향기 멋있다. 향기교수님 정말 멋있다.”
그런 말을 들을 날이 정말 올까?'
'정말 나에게 그런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