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초록

여행의 기록

by 피아노

제주의 6월은 수국인가. 길가 여기저기 수국이 피어있다. 하늘도 다르고 가로수도 다르고 공기도 다르다. 넓게 펼쳐진 하늘과, 꽃과 열매가 달린 가로수와, 신선한 공기가 그렇다. 제주도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감각도 달라진다. 제주의 자연을 보려고 눈과 귀와 코를 연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어우늘>이라는 식당으로 가라고 한다.

식당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수국이 보이고 정원에 꽃이 가득이다. 정원에 가득한 귤나무부터 노랑, 분홍, 이름 모를 꽃들과 초록 풀들로 내 눈이 휘둥그레진다. 강풍과 비가 예보되어 걱정을 안고 온 제주에서의 첫 식사는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에서 전복솥밥정식으로 시작한다. 친구의 예약과 계산까지 해준 뜻밖의 선물에 놀라고, 꽃이 가득한 정원에 이차로 놀라고,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에 또 놀란다. 현지인의 식당 추천에 감동되어 우리 계획은 제쳐두고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냐고 현지인 친구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함덕해변이나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가라고 한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절물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숲이 펼쳐진다. 초록세상이다. 숲을 향해 걷는다. 데크로 완만하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숲을 향해 걷는다. 이렇게 흐린 날의 숲엔 운무인지 뭔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들린다. 숲에 반해 감탄사를 계속 쏟아낸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던 우리는 거대한 나무가 숲을 이룬 다양한 형태의 줄기와 잎을 관찰하며 세상의 모든 초록들을 본다. 내 몸의 모든 감각기관이 숲에 집중한다. 긴 호흡을 하며 명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세상과 단절되어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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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숲이 좋다. 숲길이 좋다. 숲에서 나와 수국을 보러 넓은 정원이 있는 카페 <마농드블랑>으로 향한다. 모양과 색깔이 다 다른 수국들이 엄청나게 많이 피어 또 눈호강이다. 이렇게 많은 수국을 처음 본다. 땅이 알칼리성이냐 산성이냐에 따라 빨간 꽃이 피기도 하고 파란 꽃이 피기도 하는 이 꽃은 크기가 작은 진꽃은 곤충을 유인할 수가 없어서, 큰 가꽃으로 곤충을 유인하는 생존전략을 쓰고 있다. 신비로운 식물의 세계다.

수국을 눈에 담으며 생각한다. 일상에서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신이 주시는 선물인가. 감사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사계해변으로 가서 조금 달려본다.ㅎ

입구에 이곳은 <흰물떼세>가 3~6월에 알을 낳는 해안사구로 알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안내표지가 있다. 그런데 해변에 조그만 흰물떼새 한 마리가 콩콩콩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귀엽다. 이른 아침 사계해변 해안사구에서 본 너다. 너무 빨라서 사진은 못 찍었다. 귀여움 한도초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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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해변의 모닝조깅 후 <오설록>의 <티클래스>를 예약하여 체험을 한다. 오설록의 정원을 산책하고 넓게 펼쳐진 녹차밭의 초록을 본다. 티클래스를 받기 위해 오설록 안에 멋진 공간으로 안내되고 다기세트와 차, 오메기떡이 준비되어 있다. 강사의 설명에 따라 뜨거운 물을 부어 다기를 따듯하게 데우고 천천히 찻잎을 우려 본다. 찻잎을 덖는 과정부터 보여주고 그 잎을 우려 따듯한 차를 마신다. 차를 즐겼다던 추사 김정희가 유배로 제주에 머물던 공간을 모티브로 하여 지은 티클래스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차를 마시는 이 행위가 명상이다. 명상이 따로 없다. 차를 음미하고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근심이 날아가고 걱정이 사라진다.

친구도 만족스러워하여 여행의 좋은 기분을 이어 점심을 먹으러 <한라산아래 첫마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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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없이 간 <한라산아래 첫마을>은 메밀국수가 유명한 식당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곳은 캐치테이블로 30분 전에 예약하고 가라고 했는데 그냥 가서 기다린다. 그런데 식당 뒤에 메밀꽃밭이 쫙 펼쳐져서 이게 웬 진풍경인가 했다. 봉평 메밀꽃이 늦여름, 초가을에 피는데 제주는 이렇게 일찍 피나보다. 지루한 줄 모르고 메밀꽃밭을 보며 기다리다가 맛본 제주메밀 비비작작면에 깜놀한다. ㅎㅎ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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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의 남경막국수는 일부러 막국수 때문에 갈 정도로 좋아하는데 제주의 메밀비비작작면이 남경막국수를 뛰어넘었다. 우리의 여행 이렇게 계속 좋기만 할 것인가 갸우뚱하며 <카멜리아 힐>로 향한다. 어느 해인가 12월에 와서 동백꽃 잔뜩 보고 그 빨강이 기절할 만큼 인상적이어서 다시 찾은 카멜리아 힐은 6월엔 수국축제를 한다. 동백나무 많은 정원 안을 산책하며 수국을 원 없이 본다. 하얀 수국이 눈에 띄게 아름답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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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리아 힐을 산책하고 이중섭미술관을 향한다. 그림을 볼 생각에 설레었는데 이 여행 계속 좋기만 할 순 없었나 보다. 미술관이 재개관을 위해 공사를 하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미술관 옆 올레시장에 들러 맛있는 과일모찌만 사서 제주시의 함덕해변 앞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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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함덕해변의 <홀리데이홀릭>에서 제주친구와 조우를 하고 브런치를 먹는다. 그런데 그 브런치카페 옆에 좋아하는 작가들이 북토크했던 장소인 <만춘서점>이 있어 너무나 반갑다. 작은 독립서점인 이곳에서 서점주인이 픽한 책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브런치를 먹고 서점을 돌아보고 마지막 장소인 함덕해변으로 간다.

바다 색깔이 남다른 함덕해변이다. 모래사장에 셋이 주저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선물 같은 알찬 여정이다. 오기 전 날씨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가. 비도 거의 안 오고 오히려 흐려서 다니기에 더 좋다.


예측이 가능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기관을 열고 새롭게 보고 느끼는 여행은 늘 꿈같다.

귀한 시간을 내어 준 제주친구와 새삼 목소리가 맑다고 느낀 마음이 따듯한 동행한 친구도 고맙다.


함덕해변에 풍덩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제주공항으로 향한다. 절물자연휴양림의 초록들이 마음에 남는다. 제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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