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다
그날이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 스웨터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 이렇게 가을은 매 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데 그날로부터 하루하루 바깥의 풍경은 가을의 분위기를 더해간다. 지난해 이때쯤은 힘든 업무의 스트레스를 가득 앉고 가을이 왔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그 가을과 겨울, 봄을 보내고 올해 여름부터 대체로 편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정말 감사한 <대체로 편안한 날들>이다. 힘겨운 날들은 지나갔다. 언제 또 어떤 파도가 올 지 모르지만 일단 잔잔한 날들이다. 다 지나간다.
잔잔한 날들 중 오늘은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연수를 받기 위해 사무실을 떠나 공원 옆 어느 교육도서관에 왔다. <나는 매일 나에게 다정한 글을 써주기로 했다, 김애리>는 책과, 노트 2권과, 연필과 지우개, 형광펜 등의 문구류가 들어있는 필통을 연수자들에게 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세트로 받으니 좋은 기분이 든다. 오후 두 시까지 도서관과 공원에서 사색의 시간을 보낸 후, 오후에 글쓰기에 관한 강의를 듣는 일정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좋은 기분에 좋음이 조금 더 더해진다. 늘 주말 도서관만 가다가 평일 도서관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기쁘다. 이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지인이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힘들어했었는데 개선된 공간 이용자의 입장은 음... 좋다. 마음이 붕 뜨는 아침이다.
한산한 평일 도서관의 이 분위기. 어쩔 것인가. ㅎ. 2층 자료실에 자리를 잡는다. 창밖으로 공원의 가을이 보인다. 아주 작은 볼륨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독서대가 드문드문 놓여있다. 아, 점점 세심해져 가는 요즘의 도서관들. 여행을 하면서 숙소에서 느끼는 세심함을 도서관에서 느껴본다. 학교 시설을 총괄하는 내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세심함은 무엇인지도 잠시 생각해 본다. 독서대에 받은 책을 올려놓고 읽는다. 책 표지가 일반적이지 않다. 제목이 없고 문장으로 디자인되어 눈길을 끈다.
<나는 매일 나에게 다정한 글을 써주기로 했다> 이 책은 작가가, 책을 읽다 만나는 마법 같은 문장들, 나를 울리고 멈추는 문장들을 도저히 그냥 떠나보낼 수 없어 붙잡아두고 싶어서 시작한 필사에 관한 것으로, 필사한 글들이 주는 다정함을 전해주는 책이다. 나도 필사를 해 본 적이 있지만 그때뿐이고 꾸준히 하지 않아서 이 책이 특별하다. 내가 만나는 나를 번쩍이게 하는 문장들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다.
책의 프롤로그의 일부다.
흔히 '생각'은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염원하면 그것들이 씨앗이 되어 인생길에 뿌리내린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욱 강렬한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쓴다'는 행위입니다. 의미를 새기며 꾹꾹 눌러쓴 문장들은 우리의 영혼 깊이 새겨지는 언어들이기 때문이에요. 필사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하지만 가장 단단하게 길을 내는 일이지요.
이 책은 작가가 고른 120개의 문장들과 필사할 수 있는 노트로 구성되어 나에게 영감을 주는 문장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며 읽는다. <1. 행복은 저기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도서관 창 밖의 가을풍경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 사무실 밖을 벗어나 사색할 수 있는 인문학 연수의 시간들에서 느끼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 안에 있다는 것. 2. 매일을 보내는 나의 작은 습관들의 중요함.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배움이 쌓여 차이를 만들고 조금씩 고쳐지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여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 나만 알고 있어도 충분한 자기 완결적 우주를 경험하는 일, 자주 내뱉는 언어의 습관들. 때로는 의미 없는 습관을 깨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 보는 일 3.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을 발견해 보려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런 메시지를 주는 문장들이 나에게 와닿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귀여움 견문록>은 '귀엽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한 책이라고 하는데 제목부터 귀엽다. 나도 귀여움 리스트, 아름다움 리스트, 즐거움 리스트, 슬픔리스트, 아픔리스트 등을 만들어봐야겠다.
오후 두 시까지 책을 읽고, 도서관 옆 공원 안 은행나무 숲을 산책하고 강의가 시작된다. 다섯 편의 시가 책상 위에 놓인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시를 필사해 보라고 한다. 내가 필사한 시는 김혜수 시인의 <어디 갔니>이다.
잃어버린 무선전화기를 냉동실에서 찾았어
어느 날 내 심장이 서랍에서 발견되고
다리 하나가 책상 뒤에서
잃어버린 눈알이 화분 속에서 발견될지 몰라
나는 내가 무서워
앞마당에 나왔는데 무얼 가지러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괜히 화초에 물이나 주고
시든 잎이나 떼는
그, 짧고도, 긴, 순간
나는 어디로 줄행랑친 걸까
빈 집의 적요처럼 서 있는
너, 누구니
내가 혹 나를 찾아오지 못할까 봐
환하게 불 켜고 자는 밤
이번 생애 무얼 가지러 왔는지
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어렵게만 생각하던 시를 김애리 작가의 말처럼 꾹꾹 눌러 써 내려가니 시어가 조금 읽힌다. 대체로 편안한 가을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내 심장도 내 다리도 내 눈알도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때때로 느끼는 공허함이다.
오늘 같은 고요가 주어지는 때에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도, 나의 매일 습관들도 생각해 보고 사라져 버린 내 심장과 다리와 눈알들도 찾아본다.
대체로 편안한 날들이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