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 Joonhyuk__수염 9년 차
제준혁입니다. 용산구에서 '낫투두 낫토앤바'라는 공간을 운영 중입니다.
수염은 2017년부터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되었네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생활을 일본 모 대기업에서 시작했어요. 일본회사라고 다 정장 입고 도장 찍으면서 근무하는 게 절대 아닌데, 제가 근무했던 곳은 그랬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면도하고 정장 입고 왁스 바르고 비몽사몽간에 출근을 했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면도를 하다 얼굴이 베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상사들도 매너 있고 일본회사답게 복리후생도 좋은 회사였지만, 이 커~다란 조직에서 앞으로 계속 일할 생각을 하니 일어나기조차 너무 싫더군요.
그래서 조금 빨리 이직활동을 했고, 딱 1년 만에 일본 내 작고 젊은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장을 입고 우르르 출근하는 직원 수만 명의 거대기업에서, 알몸으로 출근하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는 4,50명 규모의 소기업으로,, 외노자로서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스스로에게 쥐어준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가기로 다짐했고, 그 징표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음,, 간단명료하게 눈에 보이는 걸로 말씀드리면 낫토를 발효하고, 그 낫토를 제공하는 공간을 꾸려나가고 있어요. 사업자 업종코드상으로는 "요식업"이 맞기는 한데, 제가 요식업자,,,라는 자각은 별로 없,,네요.
'발효'와 일상 속에서 함께하면서 스스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본질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나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획을 계속 실행에 옮기고 있어요.
(어떤 일 하냐고 물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이런 표정을 지으셔서 요즘은 스스로를 "기획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수염남분들도 비슷하겠지만, (수염을 기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잘 기억해 준다는 게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요? 몇 년 전에 아버지랑 산책을 하다가 취객이랑 시비가 붙어서 경찰관이 와서 해결된 적이 있는데, 며칠 있다 수영장 강사님이 "며칠 전에, ○○에서 싸움 일어난 거 같던데 회원님 맞으시죠?"라고 하시는 걸 듣고 새삼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 브랜드를 가꿔나가는 입장에서 수염이 있어서 "모자", "안경", "수염"만으로 심볼이 뚝딱 만들어지는 건 참 좋습니다,,✌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말 걸게 되는 것처럼, 수염을 기르고 난 뒤 (정확히는 수염을 기르고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는 주변에 수염을 기르는 분이 계시면 괜스레 반갑더라고요. 최고의 스몰토오크 토픽이죠. 수염이 없었으면 성인남성이 다른 성인남성이랑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데, 수염 덕에 좋은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또 높은 확률로 수염이 있으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미지도 수염이 없을 때의 이미지보다 더 "자유로워지기"때문에, 제 스스로도 사고방식이나 관심사가 더 리버럴 해졌다고 느낍니다. 좀 더 마이너한 주제를 다루기 쉬워지고, 화려한 무늬의 알로하셔츠도 뭔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음, 4-5년 전 즈음에 회사를 운영하는 삼촌에게서 "준혁아, 거래처 사장님 따님이 되게 괜찮은 사람 같은데, 선 볼 생각 없니? 사진 몇 개만 보내봐"라는 연락이 왔었어요. 큰 관심은 없었지만 나쁠 거 없지 싶어서 사진을 몇 장 보냈는데, 다 괜찮은데 수염을 깎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아니, 나는 그쪽이 누군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만나 보고 나서 수염이 좀 부담스럽다든지, 깔끔한 게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더라고요.
누군지도 모르는 분께, 0고백 1차임을 당한 게 몇 안 되는 수염 때문에 있었던 안 좋은 일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유한한 존재인데,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정보를 얻고 무한히 늘어나는 존재와 함께하게 되면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삶이 힘들어지는 이유의 거의 대부분 아닐까요. 내가 난데,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니, 남이 말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혹하고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해야 될 것 같고, 그렇게 살아도 또 세상은 변하고 늘어나있으니까 계속 불안하고.
그래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건 같은 선택을 하건, 내게 맞는 것들만 적당히 담고 그 외의 것들은 떠나보내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떠나보낸 것들이 아쉬울 때도 있겠지만, 이미 내 손안에 있는 것들을 잘 돌보고 가꾸는 게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깐요.
그런 의미에서 콩과 균, 그리고 시간과 온도, 습도만으로 만들어지는 낫토 발효라는 일이, 지금의 저에게 덜 불안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큰 기둥이 되어준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