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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은 Sep 04. 2024

순례 12일 차: 내려놓기

Ortega ~ Burgos






오늘 새벽 5시에 울려 퍼지는 내 알람소리에 나는 평소보다 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침대는 단 4개뿐인 이 오르테가의 아담하고 작은 알베르게 안, 쩌렁쩌렁하게  방 안 울리는 소음에 나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외국인 순례자의 단잠을 깨워버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최대한 빠르게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와 문을 닫고 복도에서 짐을 꾸리고 옷을 입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지루할 테면 지루할 일상의 일과들이 이곳 순례길 위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리면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 반쯤 뜬 눈으로 욕실에서 양치와 세수를 하는 일, 깨어난 맑은 정신으로 침낭을 정리하고 반듯하게 개어 싸는 일, 깨끗한 옷을 갖춰 입고 정돈한 배낭을 짊어지는 일,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섰을 때의 다짐, 차갑고 서늘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는 일, 그날의 첫 발걸음을 떼는 일.


피곤한 몸에도 샤워를 하고 나오는 일, 빨래를 한 옷들을 바삭한 볕에 너는 것, 매일같이 다른 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아래 서는 일,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서 메뉴를 고민하는 일, 눈앞에 나온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 글라스 와인의 향을 음미하는 일, 포도향을 폐 깊숙이 채우는 것, 와인이 혀끝에 닿았을 때를 충분히 만끽하는 일, 순례자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일, 따뜻하고 포근한 침낭에 들어가 잠이 들 때까지 책을 읽는 일.


반복되는 일과에도 내 정신은 상당히 고양되어 있었다. 이것이 단지 순례자의 길 위 내가 순례자라는 이유에서 일까? 그전 나의 중국 생활에서의 일상과 무엇이 크게 바뀌어 버린 것일까?






오늘의 목적지는 부르고스이다. 어느덧 순례 12일 차, 내 발걸음과 나의 마음은 순례 첫날과 다르게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새벽 5시 반 오르테가의 작은 알베르게를 나섰고, 이른 새벽 셀 수 없는 별들이 각자의 빛으로 새카만 하늘을 빛내고 있다. 쏟아지는 별들이 내 발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시선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먹먹하고 웅장해졌고, 가느다랗고 미세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별들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보다도 훨씬, 아주 잠깐 반짝하고 사라질 나의 찰나 같은 생의 시간은 무엇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건지,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조용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약 3시간을 걸었을 때, 내 앞으로 십자가 모양의 거대한 조형물이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철의 십자가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철의 십자가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들고 온 조약돌이나 의미가 있는 자신만의 물건 내려놓고 가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순례자 각자만의 버리지 못한 미련,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 삶의 걱정이나 불안 같은 것들, 바라는 소원 등을 담은 조약돌을 고향에서부터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지고 있다가 이곳에 내려놓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이것이 철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철의 십자가는 순례길 25일 차 폰페라다를 향하는 길 위에 있다. 잘된 일인지 몰라도 나는 며칠 앞서 이곳에 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중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계속 지니고 있던 1위안짜리 동전을 이곳에 올려두고 왔다. 나는 그것을 올려두면서 헛헛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십 년간 짊어졌던 짐을 이곳에 내려둔 것이다.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에 아주 내려놓고 오고 싶었다.




십여 년간 내 청춘을 보낸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그곳을 정리하고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중국에 처음 가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이다.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내가 교환학생을 하기 위해 중국을 선택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해외교환학생 중 경쟁률이 높지 않아서, 다른 문화 차이를 느끼는 것에 별다른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 중국이란 나라가 뜰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에 등 이유를 붙일 수도 있다. 심지어 나는 중국어를 하지도 못했다. 중국어라고는 이얼싼 밖에 몰랐던 내가 1년간의 교환학생을 마친 후에도 중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업을 하고 주재원을 하며 약 십 년간 그곳에 지내게 될 것을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를 하나도 몰랐다. 전공수업은 영어로 수강했고, 그 외의 수업, 환경, 생활의 모든 것이 중국어였다. 자연스럽게 중국어에 노출되었고, 그곳에 살기 위해서 나는 중국어를 알아야 했다. 중국어는 그래서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아니 익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수준 정도의 언어를 익히고 통달하니, 그 나라의 문화와 환경이 보이고 드러났다. 그 나라의 사회 문화를 인정할 순 없지만 차이를 인지할 수 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한국인에 대해 호의적이었음으로 그곳에 비교적 잘 적응한 편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코로나가 터지기 전, 2019년 무더운 여름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창업을 하기로 결심한 나는 정부 대출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 중에 있었다. 대출을 받고 곧바로 다시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중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와 법인을 설립하는 등 서류 작업을 준비하고,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고, 임대할 자리를 알아보고, 내부작업이 끝이 나니 계절은 바뀌어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때는 그 해의 춥고도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채 한 달 지나지 않은 시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고 전해 들은 것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로부터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중국 내에서는 당연히 조용했고, 사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나는 잠을 줄여가며 일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눈 가리고 아웅으로는 해결할 수 없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급속하고 심각하게 퍼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매장 입구에는 중국정부의 빨간 날인이 찍힌 공문서가 붙어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당분간 매장을 열 수 없다는 중국정부의 지침이었다. 기약도 없는 그 강압적인 공문서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의 시련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코로나가 심각해지자 가족들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랐고, 중국 내부 분위기도 점점 심각해지자 나는 끝까지 버티다 못해 잠시 한국에 있다 오기로 했다. 마음 졸이며 한국에 약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상황은 더 심각해져 갔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떻게 되든 중국에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었기에 점점 심각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나는 코로나가 제일 화두에 올랐던 2020년 초, 겨울 중국에서의 최장기간의 최악의 격리를 경험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던 그때, 격리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인생의 수업료라고 생각하기엔 많이 버거웠던 사건이었다. 찾아간 나의 일터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임차인도 임대인도 바뀌어 있었다.


나는 중국에서 임대사기를 당했다.








한국에 복귀한 뒤 대출 빚을 갚기 위해 취업한 직장에서 나는 중국주재원으로 발령 났고, 그렇게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과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연이다.

주재원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버텨야 했다. 돈을 벌 수 있었으므로 나는 꾸역꾸역 다녔다. 줄 곧 대륙의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 생활반경을 옮긴 탓에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사내에서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 정치질에, 부당함에 부조리에 처음에는 화가 났다. 다음에는 모든 것이 역겹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끝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는 창피했다. 실패와 상처투성이인 나는 산티아고 길 위 이곳에서 내 실패의 상처와 두려움 모두 내려놓고 싶었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실패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것처럼 새롭게 세상 앞에 서고 싶었다. 순례 12일 차,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안에 뭔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대도시 부르고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산티아고에서 연이 닿아 동행했던 일행들과 함께 연박을 하기로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 가량을 걸어온 이 시점에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5명의 일행들과 함께 에어비엔비 숙소를 예약했다. 우리는 경치와 컨디션이 좋은 큰 숙소에 묵을 수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길 위에서 만나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행들과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해 먹었다. 그동안 그리웠던 한국 음식을 요리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들떠 있었고, 와인도 잔뜩 사 왔다. 우리들의 밤은 길었고  끝나지 않는 수다를 이어갔으며, 잊을 수 없는 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고 힘들었지만 또, 사람에게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그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렇다면 사건이나 경험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주어진 상황에 영혼이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가, 삶의 기류를 내맡길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운 좋게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처럼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삶은 언제나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제임스는 휘트먼이 예찬한 "삶에서 기본적으로 확정 돼 있는 좋은 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보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보는 것, 자는 것, 몸을 과감히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익에 지나치게 무감각한 경향이 있다. 삶을 좋게 만드는 것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대개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 단계, 순전히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단계로 끌어내릴 때 삶이 제공하는 강렬한 즐거움" 덕분이다. 의미가 자연적으로 그리고 제일 먼저 생겨나는 곳은 바로 감각이다.
... 특별히 무언가를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즐기면 된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투지를 내려놓은 채 긴장을 출고 삶을 한껏 받아들이면 된다....


미하엘 하우스켈러(2021). 『왜 살아야 하는가』, 추수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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