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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은 Aug 13. 2024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Zubiri ~ Pamplona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루트, 순례 3일 차   2024.04.07




오늘도 새벽 다섯 시, 설정해 놓은 알람은 어김없이 울렸다. 다른 순례자가 깰 까봐 알람이 울리는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사이드의 버튼을 눌러 알람을 껐다. 알람을 꺼버린 나의 의식은 돌아오듯 말 듯 껌벅거렸다. 몸을 뒤척거리며 돌아오려는 의식의 끝을 붙잡고 침대에 들러붙은 몸을 떼어보지만 무리였다. 


어제 조앤과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랑을 나오기 전, 나는 그곳에 파는 지역와인을 한 병 사들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H와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와인을 한 잔 하고 잔 탓인지, 오늘 내 핸드폰에서 울린 알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하면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스페인은 각 지역 특색을 가진 와인들이 있다. 다양한 지역와인을 마시는 것 또한 순례길 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프랑스 루트를 걷는 순례자 라면 ‘리오하 와인’을, 포르투 루트를 걷는 순례자라면 ‘포르투 와인’을 다양한 종류로 접할 것이다. 포르투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도수가 조금 세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와인 가격이 싸다. 마트에서 구매하는 와인 한 병은 5-10유로 사이이다. 그 와인들의 맛은, 가격에 비해 맛과 품질에 손색없이 훌륭하다. 카페에서 주문하는 와인 한 잔의 가격은 1-2유로 사이로 커피 가격과 비슷하다. 레드 와인은 비노 띤또(Vino Tinto), 화이트 와인은 비노 블랑코(Vino Blanco), 로제 와인은 비노 로사도(Vino Rosado)라고 주문을 하면 된다. 


순례길 위 이라체 수도원에서는 무료로 와인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그곳에‘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라는 것이 있다. 그 수도꼭지를 틀어 원하는 만큼 와인을 따라 마시면 된다. 길을 걷다 보면 와인의 성지답게 ‘떼루아’라고 불리는 포도를 재배하는 농장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9-10월 정도에 걷게 된다면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포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NO VINO, NO CAMINO”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순례길을 걷는 여정에서 머무르는 도시마다 지역와인을 마셔보는 것은, 값싸고 좋은 와인을 다양하게 즐겨 볼 수 있는 기회이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 시계를 보니 일곱 시를 가리켰다. H는 여전히 자고 있다. 나는 조용히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3일 차가 되니 나갈 채비를 하는 일도 짐을 배낭에 싸는 것도 몸에 익숙해져 제법 속도가 붙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일곱 시 반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서있던 가로등 불빛은 곧 꺼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오늘은 헤드렌턴으로 길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걸으면서 나는 이렇게 느지막이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팜플로나라는 도시다. 나름 대도시라고 하는 것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핸드폰을 들어 팜플로나라는 도시를 검색해 봤다. 검색을 하다 머릿속 한 구석에 박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 그리고 카페 이루냐.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기 전,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거기서 나온 도시 중 하나였다. 산티아고 계획이랍시고 내가 여기 오기 전 수첩에 끄적여 놓은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팜플로나의 카페 이루냐, 다른 하나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 무계획이 나의 계획이었던 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일부로 찾아서 가야 할 곳이었다. 그 계획 첫 번째를 실행하기 위한 도시가 바로 오늘의 목적지 팜플로나이다. 지금 이곳으로부터 대략 22km를 걸어야 한다.  




산과 들, 나무와 꽃, 하늘과 물, 바람과 햇살, 냄새와 소리. 순례길을 걷다 보면 오감을 건드리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아침부터 자연 속에 스며들어 걷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오후가 찾아온다.

정오쯤 도착한 팜플로나, 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와.. 대도시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내가 부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것들에 눈과 귀 내 온몸이 익숙해진 것일까. 팜플로나에 들어선 순간, 사방으로 둘러싸인 건축물속에서 그동안 익숙해진 감각과는 전혀 다른 압도감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은 3일 동안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다녀간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였다.  


이 도시에서는 우선 레스토랑과 바, 카페의 수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 순례자들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알베르게 역시 선택사항이 많아졌는데, 나는 '까미노 닌자'라는 순례자 어플 맨 위에 소개되어 있는 공립알베르게를 선택했다. 어플에 나오는 알베르게의 지도를 따라갔다. 가리비모양의 조형물을 간판으로 하고 있는 이 공립알베르게의 아담한 목조 아치형 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내부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열 명 남짓 되는 순례자들이 리셉션 앞에 줄을 서 있었고 나도 그 뒤로 줄을 섰다. 내 앞에 서 있던 순례자가 나를 보고는 뒤로 돌아 나를 마주했다. 한국인 같아 보인다. 낯가림이 전혀 없이 텐션이 굉장히 높은 한국인 여자 순례자였다.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고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아는 사람처럼 다짜고짜 여러 가지 것들을 정신없이 물어보는 그녀. 

그녀의 이름은 J.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몇 분 동안 맥락 없는 질문 공세에 대화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어제 팜플로나에 도착했는데 하루 밤 더, 이곳에서 연박하기 위해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이런 대도시에서는 순례자들이 연박하기도 하는구나 하고 이때 알게 되었다.  




내가 수속을 마치고 잠시 내려놨던 배낭을 다시 메고 있을 때, 그 아치형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H였다. 


매일 각자의 속도로 걷는 이 길 위, 다양한 선택지 속 엇갈림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알베르게의 침대는 접수 순서대로 랜덤 배정이 된다. 선착순으로 1층침대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이다. 오늘 나는 운이 좋았다. 1층침대를 배정받은 것이다. 내 바로 앞에 수속을 밟은 J는 내 침대 위 2층, 내 바로 뒤로 수속을 밟은 H는 내 오른쪽 옆 침대 2층을 배정받았다. 우리는 리셉션에서 받은 일회용 침대시트를 각자 배정받은 침대 위로 펼치고 있었다. 그때 J의 일행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자가 다가왔다. J는 우리에게 S를 소개해주었다. 해맑은 목소리와 강아지 같은 귀여운 인상의 그녀는 우리가 알베르게에 들어서기 전 이미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짐을 풀고 나의 순레길의 첫 번째 계획인 카페 이루냐에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아이패드와 손바닥만 한 수첩, 펜을 가지고 오늘만큼은 혼자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글을 읽거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곳에 앉아 사색을 하거나 소설의 영감을 받아 글을 쓰던 그 모습을 상상했었기 때문에 나도 그 상상 속의 기분과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달까.  


구글지도에 카페이루냐를 검색하고 안내되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도착한 그곳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작의 작가가 앉아서 영감을 얻었다거나, 사색에 잠겼다든가 그럴 수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상상했것만, 이루냐 카페는 생각보다 대규모에, 옆 테이블 사람들이 뭘 시켰는지, 무엇을 먹고 있는지 훤히 다 들여다보일 만큼 정사각형의 테이블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사람들과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로 북적거렸고,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꽤나 시끌벅적했다. 그나마 높은 층고 탓일지 사람들이 식사를 하며 대화하는 목소리는 높이 울려 퍼지며 흐려지는 듯했다. 저마다의 대화소리, 커피원두가 갈리는 소리, 식기가 부딪혀 '팅'하고 나는 차가운 소리들, 의자를 끄는 둔탁한 소리들이 섞여 천장으로 웅웅하고 퍼져 있었다. 

그곳은 '헤밍웨이가 사색을 하고 소설의 영감을 받았었던 곳'이라는 단지 간판만을 내세운 대규모의 상업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나는 카페 내부, 헤밍웨이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 한번 앉아 보고 싶다는 계획을 접고, 그나마 탁 트이고 한적한 야외 테이블을 선택했다. 테이블에 앉아 나는 방금 핸드폰으로 메뉴판 사진 찍은 것을 확대하여 찬찬히 살펴봤다. 메뉴판 사진을 보는데 나의 눈에 들어오는 건 딱 이 세 가지이다. ‘Café Solo, Café Americano, Café con Leche’. 내가 메뉴들에서 알아볼 수 스페인어는 이게 전부이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물론 아이스커피는 없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스페인 사람 남녀노소 커피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스페인의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에도 커피가 한몫하는 듯했다. 스페인의 거리 곳곳, 카페, 음식점, 베이커리 등에서 커피는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꽤 오랜 시간 여유롭게 앉아서 신문을 읽거나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주인, 종업원 상관없이 다 같이 여유롭게 대화하며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모습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에스프레소는 카페솔로, 아메리카노는 카페 아메리카노, 카페라테는 카페 콘 레체라고 주문하면 된다. 주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던 내가, 따뜻한 '카페 콘 레체'에 빠지게 된 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는 분위기와 그 따뜻하고 고소한 맛 때문이었다.


커피를 시키면 대부분은 작은 쿠키나 빵을 곁들여 준다. 가격도 무지 싸다. 카페 콘 레체 한 잔에 1유로 초반에서  2유로를 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여유를 즐긴다는 것, 만끽한다는 것이 이곳에서는 사치가 아닌 만연한 문화이고 보편적 일상인 듯했다.  


베이커리에서 커피를 시키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대부분의 카페나 식당 보다 더 일찍 문을 열고 닫는 베이커리에서는 새벽부터 바게트와 크로와상을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를 맡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갓 나온 따뜻한 빵을 구매하기 위해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린다. 베이커리에서 나는 아침식사로 갓 구운 바게트 토스트를 버터와 딸기 잼에 발라 먹거나, 쫄깃한 크로와상을 먹었다. 가끔 단 것이 당길 땐 초콜릿 가득한 뺑 오 쇼콜라 하나를 시켰다. 그것과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시켜 놓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챙겨 온 수첩에 글을 끄적이며 스페인 사람들과 같이 여유를 즐겨 보기도 했다. 매일 같이 내가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해 날이 밝기 전 순례길을 나선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오늘도 이곳에서 나는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따뜻한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시킬 예정이다.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것이 있는지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다. 사진이 없는 메뉴판은 메뉴를 주문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핸드폰으로 번역기를 켰다. 그리고 찍은 메뉴 사진을 업로드하니 그대로 번역되어 나온다. 근데 메뉴들이 좀 섬뜩하다. ‘이베리아 햄, 토마토, 피망의 어깨. 캐러멜 양파를 곁들인 염소. 파를 위한 카페 이루냐...’ 머릿속으로 이 메뉴들은 과연 어떤 음식일지 상상을 하다 이내 이것들을 시키는 것은 포기하고, 짧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는 메뉴, '새우튀김'을 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새우튀김이라고 번역된 단어 'Frito de Langostino'를 나는 몇 번이고 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입에 그 단어가 붙었을 즈음 종업원을 불렀다.  




"올라!

운 카페 콘 레체, 운 프리토 데 랑고스티노

그라시아스!"  

*"안녕하세요!

카페라테 한 잔, 새우튀김 하나

감사합니다!"




내가 종업원을 불러 세워 시킨 음식은 카페라테와 새우튀김이었다. 카페라테와 새우튀김이라니… 이상한 조합이다 싶다가도 피망의 어깨를 먹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음식을 시킨 후, 내 앞으로 보이는 광장 쪽으로 시선을 두고 멍하니 있는데, 왼쪽 옆 테이블의 남성이 말을 걸어온다. 내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앉아 있던 그는 아마 내가 중얼중얼 메뉴판 공부를 하고 있을 때부터 봤을 터였다.  




“어디서 왔어요?”라며 나에게 영어로 질문했다.  




내가 “코리아”라고 단답을 하곤,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라든가 “너는?”이라는 꼬리를 문 질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이내 나를 향한 새로운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순례자예요?”  




내가 배낭을 메지 않아도, 순례자 표시인 가리비 조개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나는 어느새 순례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던 것이다.  




"네"  




내가 팜플로나 대도시에 들어왔을 때 어색함을 느낀 것처럼, 도심 속 북적거리는 카페 이루냐에 앉아있는 순례자인 나의 모습이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 내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그는 실없는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더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질문을 하겠다는 듯이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쪽에 같이 앉아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는 모습으로 가장한 표정 지은 채 그를 향해 말했고, 고개를 다시 정면의 광장 쪽으로 돌렸을 때, 주문한 이상한 조합의 음식이 나왔다. 새우튀김이 나왔는데, 접시 위 달랑 한 개… 단 한 마리의 새우가 올려져 있었다. 맙소사…


접시에 덩그러니 올려진 새우 한 마리를 보고 있으니, 머쓱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속으로 “이게 뭐야…?”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그런 나를 보더니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건 타파스야"  




“타파스?"  




“음식이 한입거리로 조금씩 서빙되어 나오는데 주로 안주거리로 먹는 거야” 




그러더니 그는 자신이 앉은 의자를 내 옆으로 슬금슬금 옮기고, 결국은 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가져왔던 아이패드와 수첩을 꺼낼 일이 없어졌다. 나도 이미 포기를 해버린 것이다. 내 상상 속 조금 하고 한적한 카페에서 헤밍웨이가 앉았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조용한 나만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을 실행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부터 어차피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귀네쉬, 터키사람이다. 건축일을 하기 때문에 스페인에 오게 됐는데 이 근처에 거주한 지는 벌써 9년째라고 했다. 그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는 한입거리 새우튀김 타파스를 단숨에 먹어 버렸다. 점심식사로는 아직 한참 부족했던 나는 다시 핸드폰 번역기로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재료들의 조합으로, 그 메뉴들을 상상해 봤지만 감이 잡히지 않자 나는 귀네쉬한테 메뉴 중 몇 가지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그는 바게트 위에 참치 샐러드와 캐비어가 올려져 있는 타파스 하나와 식초에 절인 올리브와 매콤한 작은 고추를 끼워 만든'Gilda'라고 불리는 꼬치 음식 핀쵸스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그가 설명해 준 몇 가지를 내가 스페인어로 따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종업원을 부르고 주문을 했다. 내가 방금 외운 스페인어로 메뉴를 주문했을 때 종업원은 뭔가를 나에게 되물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귀네쉬가 종업원과 뭐라고 하더니, 나에게 'Gilda'에서 엔초비와 햄 두 가지 중 어떤 걸로 선택하겠냐고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나는 엔초비를 먹겠다고 했다.  




그는 타파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타파스의 타파(Tapa)는 뚜껑이라는 뜻이야. 옛날에 술잔에 파리가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빵을 잔 위에 덮어서 팔았는데, 그게 타파스의 유래가 된 거지. 바게트 빵 위에 생선이라던지, 소시지, 햄, 치즈 같은 것들을 올려서 바 테이블에 진열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어?”  




나는 바에 가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는 그것들을 떠올렸다.  




“타파스는 그렇게 핑거푸드 형태도 있지만 꼬치형태도 있고, 작은 접시에 담겨 나오기도 하고… 방금 시킨 꼬치에 끼워 파는 'Gilda'가 최초의 ‘핀쵸스’로 타파스 문화와 접목하게 된 거야. 대부분의 소량으로 서빙되어 나오는 안주 형태를 타파스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리고 술 한잔을 시키면 무료로 타파스를 제공하는 곳도 많지.”  




내가 주문한 음식을 먹으면서,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바에 들어가서 술 한잔을 주문하고 타파스를 한 두 개를 시켜 먹은 뒤 또 다른 ‘타파스 바’로 옮겨, 그렇게 몇 번이고 옮겨서 가볍게 술과 타파스를 즐기는데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이 주말을 즐기는 법이야.”  




나는 입가심으로 남아있는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면서 머릿속으로 "아.. 오늘이 일요일 주말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준비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서는 나의 오늘 할 일 이라고는 25km 내외를 걷는 일뿐인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과 속에서,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제대로 인지하고 구분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한 블록만 넘어가면 유명한 타파스 거리가 있어, 같이 팜플로나 구경하고 저녁에 타파스 먹으러 갈래?”라고 말하는 귀네쉬 때문에 나는 이걸 다 먹고 나면 곧장 알베르게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계획대로라면 이 카페 이루냐도 혼자 쉬고 싶어 나온 거였지만.  


귀네쉬의 팜플로나 가이드와 타파스바의 저녁 제안은 거절을 하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알베르게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부엔 까미노”라며 인사를 건넸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H가 내 옆 침대 2층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에게 점심은 먹었는지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나는 베개를 등에 대고 1층침대에 구부정하게 기댔다. 꼿꼿하게 앉아있으면 머리가 2층침대에 닿기 때문에 누워있거나 등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하릴없이 핸드폰을 뒤적이다 이내 버튼을 눌러 꺼진 화면의 핸드폰을 잠시 침대 위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위쪽 대각선에 있는 그의 인기척이 신경 쓰였다.  




“있다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있는 옆의 2층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보고 얘기하고 있는 그에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좋다고 대답했다.  




저녁 일곱 시가 돼서, 나와 H는 알베르게를 나섰다. 알베르게 밖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에 잠겨 있다. 낮인지 저녁인지 시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4월, 스페인의 낮은 이렇게나 길었다.  


까스띠요광장, 구시가지, 팜플로나 성벽… 카페 이루냐에서 만났던 귀네쉬가 팜플로나에서 가볼 만한 곳이라고 같이 가보지 않겠냐던 그 장소들을 H와 함께 걷고 있다. 우리는 팜플로나를 충분히 걸은 뒤, 타파스 거리로 향했다. 태양은 기울고 하늘은 점점 밤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쓸쓸한 그의 눈동자, 뭔지 모를 무거운 먹구름을 혼자만 뒤집어쓴 것 같은 그. 처음 그를 봤을 때 어두운 안색과 표정이 단지 야간버스를 타고 온 것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바로 그다음 날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만났던 어떤 남자에게서도 이런 정체 모를 쓸쓸함은 느껴본 적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 쓸쓸한가. H는 그의 쓸쓸한 마음과 심정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타파스 거리에 들어선 우리는 적당히 북적이고, 적당히 조용한 타파스바를 골라 들어갔다. 각자 맘에 드는 타파스를 하나씩 고른 뒤, 마시고 싶은 술 한잔씩을 시켰다. 북적거리는 가게 안 조용한 테이블 앞에 어디서부터 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그의 이야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붙잡고 쓸쓸하게 꺼내 놓았다. 


나는 그 먹구름의 일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기에 나는 그 깊이를,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고, 그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것이 위로가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안쓰러운 그에게 나는 무책임한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위로 같은 것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시작됐던 것이다. 나는 그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왜 애써 혼자가 되려 하는가,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나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감정을 쏟는 것은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를 신경 쓰기 시작한 건 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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