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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은 Aug 13. 2024

순례 4일 차~: 가장 무도회

Pamplona ~ Belorado




팜플로나의 월요일 아침은 서늘했다. 주말이 지나간 대도시의 아침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알리듯 사람들이 각자의 일과로 분주하다. 책가방을 멘 초등학생 무리들은 떠들썩하게 인도 위를 지나갔고, 겉 옷을 여며 쥔 직장인들은 잰걸음으로 출근시간을 맞추고 있었다. 상점들의 셔터문은 드르륵하며 열리고, 마트를 나서는 여인들에 손에는 큼지막한 장바구니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순례자도 어김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누구는 일행과 함께, 누구는 혼자, 누군가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도시까지 22km를 걸을 예정이다.

팜플로나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J와 S가 하하 호호 떠들썩하며 나의 앞에서 걷고 있다. 그녀들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 나오지 못한 잠잠한 새벽을 흔들어 깨우듯 그렇게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뒤를 돌아보는 그 둘에게 나는 가볍게 손인사를 건넸다.


걸음이 느린 나는 그 둘에게 먼저 가도 좋다는 손짓으로 점점 거리를 두고 멀어졌고, 그 둘의 뒷모습이 서서히 작아져 이윽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혼자 조용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혼자 걷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았다.






이 길 위에서는 나는 진심이기로 했으니까. 혼자인 동안은 내가 진짜 내 모습이어도 되기 때문일까? 어떤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 내 몸에 밴 습관이어서 불편하거나 힘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는 가짠지 나 자신만은 알고 있다. 나는 그 가면을 남들 앞에 벗기가 두려운 것일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젯밤 타파스바에서 H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상처받은 그를.. 그를 상처를 준 사람들을.. 그 사건의 배경들을.. 그가 떠안은 삶의 무게들을... 그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나는 문득 부적절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 쓸쓸한 눈을 가진 그가, 투명하게 보이는 그의 마음과 표정이, 그 어두운 분위기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가슴속에서 숨을 내뱉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르른 초원이 내가 걷는 길의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한결같이 흔들리는 밀밭이, 거센 바람에 몸을 맞기는 연약한 아마폴라의 꽃줄기가 꺾이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내 뒤에서 H가 걸어왔다. 그는 나의 속도에 발걸음을 맞췄고, 우리는 그 속을 같이 걸었다.


푸르고 광활한 밀밭을, 한없이 맑은 하늘 아래를,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공기 안을, 바람이 불어오는 자연의 속을 걷고 있었다.  오늘 걷는 길은 고도가 꽤나 높은 편이었으나 오르막을 오르고 산을 타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H는 우리가 오늘 걷는 길 위에 ‘용서의 언덕’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몇 개의 명소들이 있는데, 용서의 언덕이 그중 하나이다. 그는 용서의 언덕에서 자신에게 상처 준 그 사람들을 용서해 보겠다고 나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서가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될 것이었으면 애초에 이곳에 그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드리우며 걷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쓸쓸해 보이진 않았을 텐데.. 그는 나와 다르게 포커페이스를 하는데 미숙하다.

그런 생각들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이 그냥 라임에 맞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농담이 반쯤 섞인 말로 라임을 맞춰 말했다. "용서의 언덕에 왔다고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용서하려고 할 필요가 있나"라고.




용서의 언덕을 의미하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만약, 산티아고 끝에서 내가 답을 찾게 된다면, 그가 용서한다던 것들을 용서할 수 있다면 이런 의미가 있는 용서의 언덕을 지나온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용서의 언덕'의 의미>
언덕을 오르는 과정에서 고통과 노고를 통해 영적인 정화를 경험하는 것,
과거의 죄와 후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다짐,
개인적 치유와 성찰의 시간






우리가 그곳에 다다랐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앞서갔던 J와 S도 있었다. 그리고 몇몇의 한국인 순례자가 있었다. 그 언덕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기로 했다. 언덕의 시원한 바람이 흘렸던 땀을 식혔다. 용서의 언덕 조각상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사람들과 간식을 나눠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 언덕 위에서 충분히 오랫동안 우리는 앉아 있었다. 그리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순례길 5일 차 오늘의 목적지는 에스테야라는 도시이다. 나는 혼자 걸으면서 H를 생각했다. 팜플로나에서 H의 아픈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 나는 그에게 애정을 느꼈다. 애정이란 이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오지만, 의지할 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5일 동안 피로가 누적되고 살짝 예민해진 느낌이다. 오늘은 알베르게대신 개인숙소를 예약했다. 알베르게에 비해 4-5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철저히 혼자이고 싶었다.


개인 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그 방 안에서 혼자 조용히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저녁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방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창문에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나는 방안에 딸려있는 개인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그리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하얀 이불을 두 손으로 끌어올려 눈밑까지 덮어썼다. 어둠 속, 그림자가 드리워진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내 두 눈이 뜨거워 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뜨거워진 그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오른 눈물이 더 이상 눈가에 담기지 못하자 한 줄기 굵은 눈물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한 번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계속해서 흘러 내렸다.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만 흐르고 흘렀다.


배게 커버를 다 적시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내 배낭의 무게는 그 누구보다 가볍게 덜어냈지만 마음의 무게는 내려놓지 못해다는 것을.







6일 차를 걷는 이후로 나는 마음을 조금 비워보기로 했다. 어젯밤 나는 까미노가 데려다 놓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열고 따라보기로 했다. 까미노 위에서 부는 바람에 내 온몸을 맡기고 믿어보기로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 길 위에서 생기는 모든 사건에 그게 무엇이고 어떤 것이든지 마음을 열어보기로 했다. 


삶이 장난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장난에 맞춰 즐기는 것이 최선의 전략인 법이다.
..."삶은 코스튬을 입고 즐기는 소풍과 같지요. 누구든 배역을 맡아 등장인물인 척을 하면서 언제라도 합리적으로 광대 노릇을 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찰리 노블은 온 세상이 하나의 무대와 같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그 무대 위에서 여러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역할은 다른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맡고 싶은 역할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연극이 지속되는 한 편히 즐기는 마음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하엘 하우스켈러(2021). 『왜 살아야 하는가』, 추수밭출판사




6일 차 로스 아르코스로 가는 길 정오를 넘어선 때, J와 S 그리고 H를 만났다. 그렇게 만난 이후로 우리는 며칠 동안 동행하게 되었다. J는 통통 튀고 솔직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으며, S는 순수하고 해맑아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리고 H는 여전히 쓸쓸했다.


난 가면 뒤의 얼굴을 숨긴 채 그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불편하지도 힘이 들지도 않았다. 이들과 함께 걷는 동안, 나는 그저 이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느껴졌다. 가면 뒤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을 만큼.






N과 동행하게 된 것은 9일째 저녁을 보내고 난 뒤부터이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고, 그때 N도 합류하게 되었다. 나보다 2살이 어렸던 N은 전혀 어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성숙한 남자였다. 185cm는 돼 보이는 큰 키와 체격으로 늠름한 풍채를 갖춘 그는, 그 겉모습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류였다. 어떤 것이 그 나이보다 성숙하게 느껴지게 했는지, 일찍이 철이 들었을 것 같은 가볍지 않은 그의 분위기를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벨로라도에서였다. 알베르게 저녁노을이 지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다 같이 올라갔다.

지는 노을은 슬픔을 안고 있다. 나는 줄 곧 그렇게 느껴왔다. 그 노을이 지고 있는 것을 앉아서 보고 있자니, 나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말없이 노을을 바라봤다. 뒤에서 떠들썩거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N은 조용히 내 옆에 있어주었다.

오랫동안 내 옆에 있어주던 그에게 이야기했다.


"지는 태양은 슬퍼, 아련해... 그래서 나는 떠오르는 태양이 좋아. 난 밤보다 아침을 좋아해.."


무엇이 슬픈 것인지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길을 잃은 거야...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이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수수께끼는 시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그 해결책은 시공간 바깥에 존재한다." 사실들은 문제의 일부이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확히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어떤 사실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바로 그 문제가 정확히 무엇일까? 물론 이미 의미의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의미의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 우리가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정확히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 , 어떤 질문에 대답 가능한(논리적이고 명료한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 자체가 그만큼 모호하고 불명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질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사실이 상황을 악화시키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질문이 명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수수께끼 역시 소멸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회의주의는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미하엘 하우스켈러(2021). 『왜 살아야 하는가』, 추수밭출판사



한참을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가 말했다.



"근데 이해해 보고 싶어"



마지막 M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앞에서 가면을 벗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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