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ua ~ Santiago de Compostela
순례길 마지막날 아침이다.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고작 19km를 남겨두고 나는 지금 어떠한가?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이고, 다른 이들은 또 어떤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얻었나? 결론은 났나?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뤘나? 얻고 싶은 것을 얻었나? 끝을 가봐야 아는 것일까? 그 길 끝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신은 결론을 지어주실까? 내가 믿는다면 그렇게 만들어 주실까? 그게 내 확실한 마음일까?
산티아고 길 마지막에 더 많은 물음이 생기고 말았다.
아침 일곱 시 반 마지막 순례길을 걷기에 앞서 카페에 들렀다. 쌀쌀한 아침 공기 탓에 따뜻하게 마실 것이 필요했다. 카페 콘 레체 한잔을 시켜놓고 멍하게 앉아 있다 옆 의자에 올려 둔 배낭에 달려있는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내내 배낭에 걸고 다녔던 십자가를 떼내었다. 까미노를 걷던 어느 날, 길 중간에서 우연히 주었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위에는 'SOLO DIOS'라고 적혀있다. '오직 신'이라는 이 글자가 적힌 십자가를 나는 손에 꼭 쥐었다.
신만은 알고 있을까. 마지막 날이니 제발 답을 알려 달라고 나는 신께 빌고 있었다. 정말 끝에 가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래도… 적어도…
내게 신앙이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가 남아있다.
… 호기심, 호전성, 도의심이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자연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효과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혼이 너무 병든 나머지 무엇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무엇을 위해서도 싸울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며,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존재들이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고 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경우라면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다. 바로 종교적 신앙이다. …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인가 모든 것을 좋게 만드는 혹은 적어도 선을 향해 나아가는 힘으로서 작용하는 고등한 영적 질서가 존재한다는'믿음'을 가리킨다.… 신앙이란 의심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선택지임에도 무언가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미하엘 하우스켈러(2021). 『왜 살아야 하는가』, 추수밭출판사
마지막이라는 싱숭생숭함을 안고, 편치 않은 마음을 붙들고 길을 혼자 걷고 있다. 며칠 전, H에게서 문자가 왔다.
"산티아고에서 봤으면 좋겠어"
마지막 순례길 위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날 보다도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다. 내 몸 안의 중심 어딘가가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아래, 저 깊숙이 지구의 내핵까지 아주 강력한, 나만은 다른 중력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정오가 되기 전, 일행들에게 연락이 왔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다 같이 들어가지 않겠냐고 내게 묻는다. 기다리겠다는 일행들을 두고, 점점 무거워지는 내 발걸음은 마치 누가 나를 본다면 끝끝내 그 목적지에는 도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열두 시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나는 그 시간 길을 잃었다. 시간이 되자 일행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 그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먼저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마음 놓고 길을 잃기 시작했다. 제일 빠른 길을 알려줄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은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갔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눈앞에 보일 때는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곳엔 아무런 결론도 H와의 오해를 풀 수 있는 속 시원한 대답도 존재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끝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 그건 끝이 있음으로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의 초입부터 파티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고, 대규모의 사람들이 북적댔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건 기쁜 일인가 보다. 하지만 그게 끝이라는, 내일이면 더 이상 걸어가야 할 어딘가가 없다는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혼자 덤덤하게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해 서있다. 눈앞으로 펼쳐진 산티아고 대성당이 내가 그토록 닿고 싶었던 곳인가? 나는 기쁜가 슬픈가. 아무 감정이 없는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기도 했다.
일행을 만났다. 우리는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갔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례자 안내소가 있었다. 그곳의 있는 컴퓨터로 국적 이름 이동수단과 출발일 그리고 신앙여부 등을 작성하고 대기 번호를 받는다. 번호가 되면 그동안 찍었던 스탬프가 모인 순례자 여권을 들고 접수처로 간다. 순례자 여권에 찍혀 있는 처음과 끝의 스탬프의 날짜, 그리고 100km 순례길 통과여부를 확인한다고 한다. 확인절차가 끝나면 컴퓨터로 기입한 내용을 토대로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증명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무료로 발급할 수 있는 증명서, 출발지와 출발일 그리고 걸어온 총거리가 적혀 있지 않은 것과, 이것들이 상세히 적혀 있는 유료 증명서가 있었다. 유료증명서의 가격은 3유로, 이 증명서들을 보관할 종이 원형 통 같은 것을 팔았는데 그것은 5유로였다. 나는 이런 것들에 큰 의미가 없었으므로 무료 증명서 하나를 발급받았다.
증명서를 발급받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가만히 앉아 그것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향해 달려온 이곳을, 울고 웃으며 서로를 껴안는 순례자들을, 사진을 찍어주는 나의 까미노 가족들을, 푸른 하늘 위로 높게 솟아 있는 대성당의 꼭대기 세 개의 십자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고 바닥에 누운 듯한 자세로 양팔을 뒤로 대고 앉아 그렇게 오랜 시간 있었다. 눈을 감으면 성당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그곳에 내리쬐는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면 나는 또 그것을 느끼고 싶어 눈을 감는다. 그럼에도 아무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이라는 슬픔은 없었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기쁨도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덤덤하게 현재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찾은 답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 길 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모든 감정이 필요했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의 새로 태어난 나 자신으로 돌아와 한 뼘 성숙해짐을 느낀다. 정답을 찾으려고 올랐던 이 길 위에서 그렇게 헤매고 견디고 배우는 그 과정 자체가, 또 그 길 위에 내가 서있는 것이, 어쩌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 내가 알아야 할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지금을 느끼고, 느껴지는 감정을 소중히 하고, 모든 감각을 열어 두는 것 그리고 늘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했던 33일 전의 나는 여기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죽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삶의 온갖 우여곡절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의 재난들이 무해하게 느껴졌고 삶의 무상함이 환영처럼 느껴졌다. … 이제 내가 평범하다는 느낌, 우연의 산물이라는 느낌, 죽을 운명이라는 느낌이 사라졌다." 만물이 지나간다는 사실, 만물이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사실, 만물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 시간이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사실은 모두 참이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은 진리를, 우리가 삶을 피상적으로 바쁘게 살아가느라 놓치기 쉬운 세상의 본질을 복원할 수도 있다.
… 예컨대 우리는 특정한 사물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지, 모습이나 맛이나 냄새가 어땠는지 잊어버린다. 우리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장소의 이름, "비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의 냄새. 차가운 쇠살대에 땔감이 처음 닿았을 때 나는 딱딱 소리"처럼 지극히 사소한 대상이 과거의 잊어버린 기억을 자극해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본래의 실체가 부들부들 떨면서 형태를 되찾고는 고요히 숨죽이고 있던 음절 사이를 찢고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래도록 죽어 있던 자아는 당시의 온갖 감정과 함께 다시 그곳에 존재하게 된다…
미하엘 하우스켈러(2021). 『왜 살아야 하는가』, 추수밭출판사
산티아고에서 일행들과 다 같이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해 마지막을 기념했다. 그렇게 하루를 묵은 뒤, H와 묵시아로 향했던 날이다. 묵시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단에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보다 북서쪽에 위치한 해안마을이다. 묵시아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34일 만이다. 내 걸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 그 속도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나는 약간의 구역질을 느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에 생각이 따라가는 것이 내 머릿속에서 어떤 시간 차를 두고 따라왔으므로 오류가 나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오니 묵시아에 도착했다.
묵시아에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비석이 0.000km를 가리킨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아니,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산티아고 끝에서 나는 죽었다. 해방감을 느꼈다.
끝없이 펼쳐진 묵시아의 대서양 바다를 보자마자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바다에 내 몸을 던졌다. 차가운 바다표면에 하늘을 보고 누운 나는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바다가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겼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도 좋을 것만 같았다.
강렬하고 무섭게, 어쩌면 조용하고 아름답게 붉은 노을이 지던, 묵시아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저녁 아홉 시경이었다. 이것은 지는 태양인지 떠오르는 태양인지, 끝인지 시작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H와 나는 삼십 분가량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 태양은 졌고, 어둠이 깊숙이 내려앉은 그때, 그가 나에게 전한 말은 나를 더 헷갈리게 했다. 그는 표현이 서툴렀고 말에 조리가 없었으므로, 동시에 그 속에 진심이 느껴졌으므로 난 답답함을 느꼈다.
다음 날,
우리는 세상의 끝, 피스테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