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일년 전 내가 쓴 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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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3학년 말 이전까지는 넉넉한 환경에서 살았으나 그 이후에는 허름한 적산가옥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살았떤 집의 2층 단칸방에서 가족 일곱명이 살았다. 고교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가마니가 문 가리개 역할을 하는 재래식 변소를 주인집 식구들과 같이 사용하는 곳에서 월세로 온 가족이 살았다. 그 변소는 여름에는 파리구더기들이 득실대는 모습이 적나라하였고 노크라는 것 대신에 인기척을 내야 했던 그런 곳이었다.
(* IMF로 천안 대우타워아파트에 살다가 우영아파트로 가게 되었다. 그 때 내나이 겨우 7살? 8살? 그러니까. 뭐가 좋은지, 뭐가 나빠진 상황인지 모른다. 그때 내가 기억나는건 아버지 친구 분중 오리 농장하는 사람이 계셨나? 거기서 오리새끼 한 마리를 구해다가 베란다에서 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태풍때문에 그 추운날 혼자 베렌다에 둬서 그 다음날 밥을 주려 나가보니 움직이지 않았고, 그게 동물과의 첫 이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이가 서른이 넘어도 무언가 키운다는게 경제적으로 돈이 나가는 것도 있지만 더 두려운 건 나보다 먼저 일찍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게 싫어서 안 키운다. 남들은 그런다. 강아지 애견사업이 활성화 되고, 강아지 장례까지 치루고, 거기다 돈을 쓰는 사람들은 돈이 남아도냐고 왜 저러냐고, ㅉㅉ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해가 간다. 사람보다 더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그래서 이해가 간다. 그리고 지 돈으로 지가 하겠다는 데 도대체 우리나라 참 자기와 뜻이 다르면 헐뜯기 좋아하는 나라다. 지 뱃살이나 뜯지 아무튼 화장실하니까 생각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했던 아르바이트 편의점 화장실이 되게 불편했다. 푸세식까진 아니였는데 깨끗한 아파트 화장실만 쓰다가 처음으로 지저분한 화장실을 보니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길바닥에만 안하지 좁던 넓던 급하면 볼일 보기 바쁘다.)
집주인은 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부부였는데 가게를 갖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순대를 작은 손수레에 끌고 다니며 파는 수준이었다. 그 주인이 사는 집이라는 것도 높이 1미터 수준의 낮은 판잣집이었으며 매일 순대 삶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높이가 그렇게 낮은 이유는 높이 1미터 미만은 건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철거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곳에서 벌레처럼 살았다.
(* 옛날엔 이렇게 살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너도 나도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아도 저 때 과거의 시절보단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보다 더 우울한 삶을 보내고 있다. 남을 싫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배 아파 하고 괴롭히고 왜 그럴까?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휴전이 아니라 전쟁 중이다. 진짜 유치하다.)
그다음에 서울역 앞 양동의 쪽방 등 몇곳을 더 거치게 되지만 가정집차고에서도 살았었다. 나는 몇 년을 그런 곳에서 혼자 살았고 주거 환경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차고 한 칸에 불과한 좁은 공간이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환경이었기 떄문이다. 그저 보유 자금을 불리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 나는 귀찮음이 심해서. 음. 귀찮음이 심하다고 많이 글에 적지만 실상은 그리 귀찮아라고 음성으로 내뱉으면서 또 할 거를 다한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셔라. "귀찮아" 라고 생각만 하지 행동으로는 실천한다. 그러니까 추임새 같은 것이다. 귀찮아. 하고 안하는 게 아니라 하면서 꿍시렁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미뤄봤다. 내 일이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해줄 일이 아니면 굳이 적립되는 게 싫어서 소리지르면서 또 하고 앉아있다. 글로만 보면 무슨 게으름 삼대장 중에 대장급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구는 그렇게 볼 수 있다. 웃기지마라 너 귀차니즘 쩌는 년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 기준이지 나는 그냥 잘 지내고 있다.)
(* 더 넒은 아파트에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타지에서 지냈던 원룸은 신발장도 넓고 화장실도 좋았고, 창 밖을 보면 가족단위여서 좋았고, 혼자 살기 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집주인 어르신께 감사하다. 3년 안 되는 기간 동안 35만원에 잘 지냈다. 관리비 또한 늘 5만원 미만으로 나왔다. 덕분에 돈을 모으게 됐다. 그래서 깨끗하게 관리를 잘 했고, 덕분에 다시 그 쪽 동네로 잠깐 갔을때 부동산 중개자는 잘 알아봐 줬다. 근데 또 한 달만에 방을 뺐다. 그때부터가 아무래도 좁은 원룸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지금 다시 가라면? 나는 또 가서 잘 지낼 수 있다. 근데 더 좋은 곳이 있는데 굳이 자처해서 내 돈 내가면서 지내긴 싫다. 부모님 옆에 찰싹 붙어서 나라에서 주는 실업급여도 받고, 복귀할 때 최대한 직주근접에서 가까운 곳에 구해서 출퇴근할 예정이다. 그래야 돈을 더 모은다. 부모님 사랑하고 사랑해요. 이런 멘트도 넣어준다. 식대비도 굳는다. 일석 몇조인지 모르겠다. 누군 나이먹고 부모옆에 붙어서 뭐하냐 할 수 있겠지만 직장을 안 구한 실업급여 인생은 부모님 비위맞추기 어렵다고 나가서 살면 그건 더 머저리 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아니면 언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는가 싶은 마음도 크다. 그동안 타지에서 지내면서 나는 혼자서 잘 지냈다. 맛있는 것도, 멋있는 곳도 내 세상인 것 처럼 잘 놀러다녔는데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맨날 집에서 김치만 담구는 우리 엄마,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는 우리 귀염댕이 엄마가 계속 작아지셨다. 아버지 또한 낚시만 할 줄 알지 아버지는 걱정이 별로 안 되는데 뭐 두 분이 알아서 잘 지내고 있다곤 했지만 타지에 있을땐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게 코로나19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뻔(?) 한 사건 때문이다. 지금은 다들 잘 지내신다. 타지에 있는 딸은 야근하고 회의를 끝내고도 천안까지 와서 밥도 먹고 다시 그 원룸방으로 향했다. 출근해야지.)
(* 그리고 나는 내 분수에 맞게 지냈다. 아파트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원룸으로 돌아가면 그만한 공간이 없었다. 나는 원룸 청소 또한 싫었다. 이상하게 신방장이나 화장실은 희열이 있었는데 나머지 청소들은 손에 아직 안 익혀진건지 미루기 일쑤였고, 특히 빨래가 너무 싫었다. 이불빨래는 한 달에 한 번 크린토피아가서 자주 빨았는데 언제 한 번은 베개를 넣고 빨다가 그 솜이 다 터져버렸다. 혼자 있어서 망정이지 그 터진 솜들을 주우면서 내가 좀 처량하긴 했지만 웃기기도 했다. 시트콤이면 도대체 몇회차가 나올까 싶었다. 웃긴 썰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내 인생 장르는 뭘까? 시트콤? 멜로? 공포영화? 근데 하나 꼽자면 나는 시트콤이 맞다.)
(* 나도 지금은 보유자금을 늘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