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May 09. 2021

내 시간을 가지다 골병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인 걸 인정하기.

6살 아이가 한 명일 때 지금처럼 피곤하지 않았다 말은 진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항상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리기 전에는 그 전이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운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6살 아이 하나만 키울 때도 워킹맘으로 일하랴 아이 키우랴 정신없이 바쁘긴 했다. 그러다 아이가 눈병 같은 전염병이라도 걸려오면 직장은 직장대로 눈치가 보이고 아이는 아이대로 온전히 돌봐주지 못해서 눈물 콧물 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가장 큰 한 가지. 잠이 보장되었다. 중간에 거의 깰 일 없이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뭐가 그리 바빴고 피곤했나 싶다. 하나만 재워도 우리만의 시간이 홍수가 나듯이 철철 넘치던 그때였는데 말이다.


제는 한 명을 재워도 다른 한 명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기 때문에 우리 둘만의 시간이 언제였는지 역사 속처럼 까마득하다.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아플 때는 또 어땠는지 지금 같으면 한 사람이 하루 빠져도 아이 한 명 정도야 실눈 감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금은 재워야 하는 아이도 두 명. 아파도 돌봐야 하는 아이도 두 명이다.


픈 것도,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머리카락을 자르러 가는 것도 다 사치가 되어 버렸다.


아이가 둘인 데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둘째가 있어 신경도 두배로 써야 하니 여간 바쁘고 정신없는 게 아니다. 유치원 숙제를 머릿속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못 보내는 날도 있다. 준비물을 잊지 않고 챙기기 위해 하루 종일 반복해서 외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루는 첫째의 밥과 둘째의 이유식을 함께 먹이고 있을 때였다. 첫째 아이의 밥을 숟가락에 떠서 빨갛게 무친 콩나물을 얹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왜 안 먹지 하고 돌아봤는데 그 숟가락이 9개월 둘째의 입 앞에 있었다. 둘째가 관심을 가지고 먹으려고 하는 직전에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렇게 요즘 나는 내 시간은커녕 둘을 돌보느라 분주하고 정신이 없다. 둘째가 통잠을 모르는 아이라서 더 그런 것도 있다. 100일 전부터 통잠을 자던 첫째와 달리 9개월인 지금까지 통잠을 자지 않는 둘째와 매일 씨름을 하다 보니 피로 누적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를 돌보는 거 말고 가장 하고 싶은 걸 고르라면 글쓰기였다. 밖에 나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고 내 시간을 내는 것도 자유롭지 않은데 글쓰기는 글을 쓰는 시간마다 내게 날개를 달아줬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가슴이 뻥 뚫렸고 시야가 뻥 뚫렸다.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다 보니 그 어떤 놀이보다 재밌다. 다시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


아이들이 커서 내 글을 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도 글쓰기에 설렘을 보태준다.


나는 글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보이며 자유롭게 유영한다. 글쓰기는 내게 자유로움 그 자체이다. 글보다 내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있을까. 글로 나타내고 글로 친해지고 지금이 너무 좋다.


그러다 보니 잠이 부족한데 그 시간조차 쪼개어 글을 썼다. 글을 쓸 때는 부풀고 설레어서 힘든지도 몰랐다. 피로가 자꾸 누적되어 몸에서 신호가 왔다. 피곤함을 넘어 편도가 부은 것이다.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근육통이 심해져 잠도 못 자고 끙끙 앓기를 며칠 째하다 결국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갔을 때 모유수유 때문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약이라고는 아기들도 먹을 수 있는 그런 약들밖에 없었다. 나는 그 약을 받으면서도 혹시 모유 수유하는 둘째에게 영향이 가진 않을까 다시 물어보곤 했다.


오늘로써 2주 가까이 편도약을 먹는 거 같다. 다행히 움직이는 것조차 고통스럽던 그 시기는 지나고 이제는 조금 살 만하다. 


예전에는 아프면 서러웠는데, 이제는 아파도 서러워할 시간도 없다. 밤늦게는 둘째 재우고, 아침이면 첫째 유치원에 보내고, 그 사이 새벽이면 둘째 깰 때마다 르고 달래서 다시 재우고.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다.


엄마가 되고 나니 아 때 아이들에게 잘 못해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목이 이렇지만 않아도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어줄 텐데, 아프지만 않으면 아이의 말을 좀 더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텐데 같은 마음.




아침에 일어나 유치원에 첫째를 보내고 나면 어디든지 기어 다니는 둘째와 시간을 보낸다. 눈 맞춤 한 번에 심쿵하고 이 두 개를 내보이며 웃는 표정 한 번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잠투정을 한다고 울어도 예쁘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 중 그 어떤 모습도 놓치기 아까울 정도다.


오후에는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다. 그러면 나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에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첫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책도 읽어줘야 하고, 심심하다면 같이 그림도 그려줘야 하고 슬라임도 해줘야 하고 마리오 파티도 해줘야 한다. 색종이 접기도. 물론 이 모든 것들을 하루 만에 다 해주진 못하지만 끊임없이 아이는 엄마를 찾고 함께 하기를 원한다.


궁금한 게 많은 첫째는 요즘 하나하나 묻는 말에 다 답을 해줘야 하는 데 그것만 해도 바쁘다. 하지만 첫째와 말을 하다 보면 대화가 되는 걸 넘어 대화 자체가 너무 흥미롭고 기발하고 재미있어서 포복절도할 때가 많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과 대답들에 첫째의 출구 없는 매력에 흠뻑 빠진다.

첫째의 엉덩이 춤과 꽃게 춤은 언제나 날 매료시킨다. 애교는 또 어떤가. 정말 솜사탕처럼 곧 녹아 사라질 거 같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매일 기다려지고 기대된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내 인기 하늘을 찌른다. 둘째 아이를 안고 있으면 첫째가 거긴 내 자리라며 내 품에 파고든다. 한쪽 다리마다 한 명씩 앉아있다. 그럴때면 꼼짝도 못하고 있는 힘껏 팔을 뻗어 아이들이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게 꼭 안고 있다. 어떨 때는 업고 있던 둘째를 기어코 내려놓게 하고 첫째가 업히기도 한다. 둘째는 기어 다니며 잘 놀다가도 종착지는 내 발목을 잡고 안아달라 칭얼댄다. 그럴 때면  손이 두 개여도 모자라게 느껴진다.


둘째 때문에 새벽에 여러 번 깨야하지만 글도 써야 한다. 시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비축한 체력도 이미 바닥을 내보인 지 오래다.


편도약을 2주 먹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하지만 모든 순간순간에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있다.


아이는 내게 축복 그 자체이다.


잠에서 깼을 때도 또 유치원에 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도 날 찾아주는 아이가 있다는 게, 기어 다니다 결국엔 내게로 방향을 틀어 엄마하고 오는 아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른다.


만약 하루 종일 글쓰기만 한다면 이렇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간절했을까?


아니다.

나는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고 여유가 없어서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


아이들 내게 정말 소중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 시간을 가지다 골병이 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종종 골병이 날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 모든 시간을 감사히 여기고 사랑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먹고 마시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해 준 존재,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