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May 29. 2021

그동안 나는 인내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육아는 나의 한계치를 끌어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육아는 날 언제든 극한의 상황으로 내던질 수 있다. 내가 던져질 준비가 돼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말이다.


내 몸을 얼마만큼 써도 괜찮은지 알고 싶다면 육아를 추천한다.


하지만 쓰는 만큼 축난다는 건 꼭 알고 시작하길 바란다.


첫째 아이와 집에 왔을 때 잠이 부족해 발바닥이 땅에 딛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 잠이 부족하면 발바닥 전체가 이렇게 아플 수 있구나 살면서 처음 알았다.


아이들이 100일이 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자지 않다가는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잠이 늘 부족했다. 거기다 통잠이라는 건 모르는 둘째 때문에 100일의 기적도 6개월의 기적도 없었다.


 늘 부족했지만 난 그 정도로 쓰러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해도 살아있는 건 물론이고 피곤은 할지언정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신기했다.


지금도 내 생각보다 강한 내가 여전히 낯설고 딴 사람 같다.


밤에도 자주 깨는 둘째가 새벽에 우는 소리에 눈을 뜰 기운조차 없다가도 눈이 떠진다.


어깨가 으스러질 거 같은데도 그래서 손가락 마디까지 당기는 날도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아 든다. 그 모습을 첫째 아이가 보고 "엄마, 나도 안아줘. 나도 나도"하고 말하면 첫째에게 등을 내어주러 기꺼이 발걸음을 뗀다.


늘 나의 아픔은 뒷전이 된다. 이 아이들은 지금 당장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나의 아픔은 당장 쓰러지거나 입원하지 않는 이상 견딜만한 수준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시킨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만큼 몸이 딱딱하게 굳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할 만하다.


손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아이의 부름에 엉덩이를 떼야한다. 그게 엄마의 숙명인가 보다 생각하 편하다.


업다보면 등이 당겨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라도 아이가 잠 깊이 빠져 들지 못한 상황이면 온 몸을 베베 꼬고서라도 업은 채로 견딘다.


아이를 품에 안고 등을 벽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조는 것도 일상이다. 나는 잠이 와 죽겠는데 아이는 깨어 있으면 누워서 아이를 눈으로 좇으며 살피다 순간적으로 졸고 깜짝 놀라 침을 닦으며 깨기도 한다.


7살인 첫째 아이물도 밥도 수박도 노는 것도 엄마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만히 있어도 무릎이 나간 것처럼 아픈 날에도 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면 필요한 걸 가져다주거나 해결해 준다. 그게 가 할 일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왜 나라고 힘들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왜 나라고 울컥하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왜 나라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슬프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순간마다 날 일으키는 힘들이 있다.


아이들의 웃음, 날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 내게 건네는 입맞춤. 아이와 교감하는 모든 게 내겐 윤활유가 된다. 삐걱거리는 내 다리를 움직이게 하고 날카로운 것에 베이기라도 한 듯 욱신거리는 어깨를 기꺼이 쓰게 한다.


신랑이 내 고단함을 알아주며 건네는 말 한마디가 그 하얗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투박한 내 발을 주물러주는 그 손길 하나가 날 기꺼이 아이들을 위해 움직이게 한다. 가 한 번 더 움직이면 그는 그 한 번만큼 쉴 수 있다. 그로 향한 사랑이 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잠깐씩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엄마, 아빠의 기꺼운 도움의 손길도 고꾸라질 만큼 피곤한 나를 일으킨다. 부모님이 인꽃이라며 아이들을 보고 행복해하는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내게는 늘 큰 힘이 된다.


몸에 힘듦은 매일이고 그럼에도 마음이 힘든 날이 오면 그날은 마지막 보루인 나를 키워 낸 엄마, 아빠의 고단했을 시간을 떠올린다.


두 분은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해내셨을까...

어떻게 견디셨을까. 나는 이미 성인이 됐으니 두 분은 무탈하게 그 일을 해내신 거다. 두 분이 자랑스럽다. 부모님의 존재는 내가 아이를 낳고 더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대상이 됐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크게 다친 곳 없이 성인이 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온 정신을 다해 아이를 돌보다가도 잠깐만 방심하면 아이는 어디에 박히고 찍혀서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 있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엄마를 찾아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내게도 찾을 엄마, 아빠가 있다는  기적이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몇 살이 되면 좀 편안해질까.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힘듦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다.


나는 그렇게 내가 좀 덜 힘들 게 사는 방식을 터득해서 육아하는 나에게 맞 진화하고 있다.


육아를 하며 아이를 낳기 전에나는 인내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 매일 깨닫는다. 거의 매일 최대치의 인내심을 끌어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최대가 어디까지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이들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매일 같은 방식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내게 인내심을 가르쳐준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서글퍼하더라도 내일 일어나서도 육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육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최대치의 긍정을 끌어당기는 힘도 육아를 통해 배웠다. 아는 나를 점점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의 몸도, 마음도 육아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쑥쑥 자라나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족의 정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