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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Nov 02. 2021

그래도 빵점이 뭐야 빵점이.

너도 놀랐지? 사실은 나도.

아이 입장에서 꼭 힘들었거나 속상했던 일은 흘러가듯이 말한다. 그래서 늘 촌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털어놓을 때는 잠들기 전이다.


지금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워있는데 복덩이가 말했다.


"엄마 나 받아쓰기 100점 맞은 적도 있는데 그 뒤로 자꾸 내려가서 뭐 20점도 맞고 30점도 맞고. 그런데 오늘은 점 맞았어. 그래도 점이 뭐야 점이. 선생님이 칠판에 쓴 거 연습해 오랬어."


'오호. 연습하는 거 하기 싫어서 이제야 이야기를 꺼냈구만.'


이럴 때 잔머리를 굴리는 걸 보면 정말 백 점짜리인데.


'어라. 근데 평소의 복덩이 답지 않 의기소침하네. 점이 충격이 컸긴 컸나 보다.'


모습이 안쓰러웠다.


사실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빵점이라는 단어가 확성기의 음성처럼 저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도 우리 복덩이가 빵점을 맞아 놀랐고 웃겼던 것이다. 빵점이라니!


그렇지만 나는 선행학습도 좋지만 내 자식 자존감도 중요한 엄마다. 받아쓰기 빵점 같은 걸로 이 아이의 가능성을 꺾고 싶지 않았다.


같이 책상에 앉아 앞으로 받아쓰기를 하게 될 단어와 문장들을 같이 연습하는 그런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복덩아. 유치원에 복덩이가 왜 다니는 줄 알아? 연습하러 가는 거야. 유치원은 학교에 가기 전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연습하는 곳이야. 연습인데 빵점 좀 맞으면 어때. 배우려고 가는 건데. 우리 복덩이 잘했어. 잘했어. 빵점을 맞다니 엄청 잘했어. 어떻게 맨날 100점을 맞겠어. 골고루 다 맞아 보는 거지. 그러니까 빵점 맞을 때도 있는 거지. 진짜 잘했네. 그리고 복덩이 저번에 엄마랑 해봤을 때도 잘하던데. 엄마하고 또 연습해보자."하고 말했다.


아이는 금세 기분이 풀어져 "그렇지. 빵점 맞아도 괜찮지?"하고 대답을 했다.


며칠 후 선생님께 여쭤볼 다른 일이 있어 전화를 했다가 받아쓰기에 대해서도 여쭤봤다.


"복덩이가 100점을 맞은 적도 있는데 그 뒤로 자꾸 점수가 낮아져서 빵점을 맞은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면서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초등학에 가기 전 선행학습 중에서도 6급으로 받침이 들어가는 단어나 문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려 수밖에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전화를 끊고 받아쓰기 6급을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넓고 푸른 초원

다툼도 많았어요.

맛있단 말이야.


예시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 복덩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선행학습은 늘 빠르다. 지나치게 빠른데 그 유치원에 보낸 건 바로 나였다. 그래서 복덩이의 좌절에는 내 책임이 가장 크다.


그랬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보낸 것도 나인데 아이가 공부 진도에 적응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닦달하고 다그치기까지 한다면 내가 정말 싫을 거 같기 때문이다.


그저 그곳에서 친구들과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며 잘 놀고 건강하게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복덩이가 자신의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아이는 더 많은 시험지를 받아 들 것이고 더 다채롭속을 뒤집을 점수도 받아 올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면 이 생각을 하려고 한다.


'아니? 나도 이 점수를 보고 이렇게 놀랐는데 직접 받아 온 본인은 얼마나 놀랐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농담처럼 그 점수를 일상에서 넘기고 나면 적어도 공부 때문에 우리 집에서 아이가 슬플 일은 없겠지.

 

가장 따뜻해야 할 집이, 가장 아늑하고 편안해야 할 집이 동그라미 몇 개, 점 수 몇 점 때문에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이가 되고 싶은 게 생긴다면 몇 점 정도를 맞아야 될 수 있다는 걸 알려만 주면 된다. 그 후부터는 아이의 몫이다.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아이는 나쁜 길로 갈 수가 없다.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앞으로도 복덩아. 엄마 사전에 조건부 사랑은 없어.'


'수학을 몇 점 이상 못 맞아서, 영어 점수가 몇 점밖에 안 돼서 네가 밉다느니 네가 자랑스럽지 못한 아들이라거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는 네 나이에 게 네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해가렴. 엄마는 네가 그런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


누구나 자신만의 달란트가 있는데 그건 다 다르기 때문에 아이가 그걸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까지가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잘하면 격 해주고, 못 할 때는 그럴 수도 있다면서 위로해주며 말이다.


얼마 전 또 자기 전 흘러가는 물에 돌멩이 하나 던지듯 무심하게 복덩이가 말했다.


"여자아이 중에 누구가 나한테 키가 작다고 놀렸어. 키가 커지면 내가 무조건 좋아했을 텐데 하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키가 작아 고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키가 그 전보다 커서 반에서 제일 작지는 않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난 그때서야 복덩이가 요즘 다시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보다 조금 컸어도 여전히 작은 축에 속하는 게 내심 속상한 모양이었다.


"복덩아 그런 말 들어봤어? 남자는 군대에 가서도 키가 큰데. 언제 어떻게 클지 몰라. 어떤 사람은 빨리 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크기도 해. 그래서 괜찮아 복덩아. 우리 복덩이는 지금도 크고 나중에 쑥쑥 더 클 거야. 또 놀리면 그러지 마 하고 얘기해주면 돼"하고 말이다. 


복덩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 그래서 중요하다. 잠들기 전 아이와 누워있는 시간은 아이와 나를 이어주는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진솔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때면 나는 숨소리마저 놓칠세라 아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적어도 하루 중 그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고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다면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내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아이의 힘듦을 대신해줄 수는 없을지라도 함께 공감하고 때로는 해결책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엄마로 자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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