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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Jan 11. 2022

신랑의 뿌리를 만나러 가는 길.

신랑이 내 눈앞에 서기까지.

신랑은 친할머니, 나는 외할머니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자랐다. 그런 할머니는 우리 둘에게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존재다.


신랑과 할머니가 지내 온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신랑의 할머니를 아끼고 사랑하자 진작에 마음먹었다.


할머니의 너른 품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자상한 신랑이 내 눈앞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깊은 사랑이 없었다면 내게도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신랑이 내 눈앞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신랑의 할머니는 내게 그저 감사한 존재였다.


그런 마음을 먹고 할머니를 뵙고 대해서 그런지 할머니는 내게 늘 따뜻한 분이셨다. 야윈 두 손으로 통통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나의 건강을 염려하고, 안부를 묻는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해가 바뀌며 할머니께 한번 갔으면 하는 신랑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다. 가족을 건사하느라 그 걸음을 얼마나 더 늦춘 줄 알기에 그가 말을 꺼냈을 때, 봄 햇살보다 더 밝게 웃어 주었다. 


우리는 할머니께 가기 전 함께 가슴이 뛰었다. 내가 사랑하는 신랑의 뿌리가 되시는 분, 내가 아끼는 신랑이 이렇게 건강하고 건실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빛과 양분이 되어 주신 분.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은 내게도 정말 기쁜 길이다.

    

신랑은 본인의 할머니 집에 가는 거니까 어떤 걸 챙겨야 할지를 며칠 전부터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남자들은 여자들만큼 세심하지가 않으니까. 세심하지 않은 그 무던함이 예민한 나를 참아줄 때가 더 많다는 걸 알기에 그저 고맙기만 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내 몫을 하기로, 잘하는 부분에서 실력 발휘를 하기로 했다.    


할머니께 가기로 한 그날부터 가지고 갈 품목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할머니께 필요한 것들이나 좋아하실 음식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수없이 던 일이었다. 치매가 심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져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가게 되신 후로 나는 갈 때마다 어떤 걸 가지고 가면 할머니가 좋아하실까 고민했다.

 

나는 얼마 전 제주도에서 시킨 귤을 떠올렸다. ‘껍질이 부드럽게 잘 까지고 과실이 달콤해서 아이들이 곧잘 먹었었지.’ 당장 집으로 한 박스를 새로 시켰다.  

    

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특별한 날이면  모시 송편이 떠올랐다. ‘이날이 아니면 언제가 특별한 날일까’를 떠올리며 출발하는 날 찾아갈 수 있도록 한 되를 예약했다.    

  

'면역력이 약해진 할머니는 가려움 때문에 고생하셨었지.' 건조한 피부에 바를 화장품을 넉넉히 샀다.   


할머니께 드릴 용돈도 꼼꼼히 챙겼다.

준비를 하는 내내 기뻤다.


할머니는 차로 두 시간 거리 막내 고모님 댁에 살고 계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마침 셋째 고모님도 계셨는데 내가 결혼을 했을 때부터 날 너무 예뻐해 주신 분이었다. 기쁨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고모님들은 아이들이 온다고 미리 뽀로로 장난감과 레고 장난감을 준비해 놓으셨다. 거기다 첫째의 식성을 기억하고 비싼 딸기까지 사다 놓으셨다. 겨울인데 창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증조할머니와 고모할머니들에게 잘 갔다. 잘 가는 정도가 아니고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동안의 근황을 주고받는 것도 애정이 바탕이 된 관계에서 시작돼서 그런지 편하고 즐겁기만 했다.  

   

고모님께서 둘째를 너무 오래 안고 계셔걱정을 했는데 그때마다 괜찮다고 하셨다. 오히려 아이 때문에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셔서 그런지 눈을 마주치면 자꾸 누우라고 하셨다. 침대에도 바닥에도 자꾸만 누우라고 하셨다.


촌수로내가 조카며느리였지만 느껴는 마음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나의 시댁 식구라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고, 그저 감사하기만 다.    

 

내게 결혼식 때와 똑같다며, 세월 가는데 나는 세월의 티가 나지 않는다고 셨다. 신랑은 곁에서 한술 더 떠 "중학생이. 중학생" 하고 말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얘기를 나누다 "저는 아이들도 좋지만, 신랑이 일 번이에요."하고 말했다. 신랑과 나의 사이가 지금도 돈독하고 좋은 걸 아시면 안심이 되실 터였다. 고모님들과 할머니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셨다.

 

고모님은 후덥지근했는데 아이들이 맨발로 걸어 다녀 발이 시리겠다며 보일러를 더 높이셨다. 그래서 나중에는 너무 더워 결국 창문까지 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게 받는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콧등이 시큰했다.    

 

셋째 고모님은 손맛이 정말 좋으신데 미리 사놓은 소고기를 넣어 뽀얀 떡국을 끓여주셨다. 함께 차려주신 두부 스테이크와 연근 조림, 견과류 멸치볶음까지 다 정갈하고 너무 맛있었다. 얼마 전에 담근 총각김치도 맛이 일품이었다.   

  

그동안 막내 고모님은 첫째 아이와 스플랜드라는 보드게임을 해주셨다. 룰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와 하다 보면 웬만한 인내심 갖고는 안 되는데 막내 고모님은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셔서 그런지 잘 놀아주셨다. 그 모습을 보며 그저 경이로웠다.     


우리는 할머니 곁에 붙어 휠체어를 끌기도 하고 아이를 할머니 앞으로 데려가 보여드리기도 하며 잊지 못할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신 적이 있어 그 순간이 더 꿈같이 느껴졌다. 왜 진작 오지 못했을까. 더 자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갈 때가 되니 두부 스테이크 연근 반찬을 싸주셨다. 이것저것을 더 물어보셨지만 우리는 이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한 분 한 분 돌아가며 아이들에게 용돈까지 주셨다. 이런 걸 바라고 온 게 아닌데. 드릴 수 있다는 마음에 기뻐하며 달려온 길이었는데. 내가 뭘 준비했는지는 새카맣게 기억이 안 나고 받은 것만 선명했다.     


돌아가는 길, 두 손도 마음도 풍성했지만 전날 세시까지 자지 않던 둘째 탓에 진이 다 빠 있었다.


차에 앉아 신랑이 사러 간 커피를 기다리데 돌아온 신랑의 손에는 하얀 종이봉투 들려 있었다. 종이봉투 속에는 쫀득쫀득한 데다 달콤한 팥이  국화빵이 담겨있었다. 파는 곳을 찾지 못해 너무나 아쉬웠던 겨울 간식이었다. 국화빵을 하나씩 호호 불어 먹다 보니 집에 금방 도착했다. 신랑의 뿌리를 찾아 떠난 그날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살아계시고 모두가 건강하기에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실보다 더 값지고 감사한 게 어디 있을까. 끝을 안다고 늘 두렵고 슬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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