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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Feb 27. 2022

행복을 고구마와 함께 구웠다.

고구마가 구워지는 동안.

금요일 밤, 신랑은 주저하더니 들으면 안 좋을 소식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나는 듣고 싶지 않다 장난스럽게 귀를 막았지만, 그는 내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말을 했다. 일요일에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것도 2시 전에 도착해야 하니 적어도 12시 반에는 집에서 나서야 한다고 했다. 수요일 퇴근 후 보고 이제 처음 보는 건데 일요일 낮에 또 가야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라면, 또 바뀔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일요일 당일이 되었다. 전날 둘째가 늦게 자는 바람에 다 같이 늦잠을 자고 있는데 거실 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열리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신랑이 들어왔다. 가봐야 하는데 잠에서 깬 첫째가 혼자 있기 무섭다며 아빠를 잡았다는 것이다. 신랑은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서야 된다고 했다. 회사에서 더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잠이 덜 깬 채로 첫째 옆에 앉아있는데 그런 날 꼭 안아주고는 허겁지겁 신랑이 갔다. 아이 앞에는 작은 상에 아침이 놓여 있었다. 내가 깨기 전 정신없는 와중에 아이의 밥상을 차려준 모양이었다. 게 오늘 본 신랑의 모습 다였다.


신랑이 떠나고 난 후의 집은 처참했다. 아이들이 읽다 던져둔 책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미처 개지 못한 이불들도 먼지처럼 제멋대로 뭉쳐져 있었다. 하지만 방과 거실은 그나마 나은 거였다. 주방에 기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두루마리 휴지부터 어제 먹다 남은 과자봉지에, 볶음밥을 다 먹고 벌건 기름만 남은 프라이팬까지 치워야 할 것들이 빼곡하게 놓여있었다. 싱크대는 차마 쳐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신랑이 간지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치워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평일에 그가 없는 것과 빨간 날인 일요일에 그가 없다는 건 체감 온도가 달랐다. 평소 일요일이었음 지금쯤 서로 부지런히 호흡을 맞춰 집을 후다닥 치워놓고 엄마가 있는 연수원으로 바람을 쐬러 갔을 텐데. 기동력이 없는 나와 아이들만 남아 집을 지키는 꼴이라니, 물에 빠진 가엾은 생쥐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빈자리만 바라보고 슬퍼하기엔 햇살 쨍쨍한 하루가 너무 아까웠다. 더군다나 우리 집에는 불을 켜지 않아도 집을 밝힐 아이들이 둘이나 있지 않은가. 나는 서둘러 베란다에 있는 고구마 박스로 갔다. 그리고는 에어프라이어를 가득 채울 만큼 길고 큼지막한 고구마를 4개나 골랐다. 한 겨울 길가에 파는 군고구마처럼 고구마 껍질이 분리되려면 40분은 구워야 했다. 타임을 맞춰놓고는 주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고구마를 굽는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기로 약속하면서 말이다. 고구마가 익어가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기괴한 냄새를 덮을 만큼 달콤한 냄새였다. 나는 그 기괴한 냄새의 출처를 찾아 부지런히 주방을 치웠다. 눈길이 닿는 곳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만큼 깨끗해져 있었고, 평소와 다른 일요일을 보내고 있었지만 내 마음도, 머릿속도 점점 맑게 개어갔다. 그릇에 묻은 기름때가 씻겨져 나가는 게 꼭 내가 씻는 것처럼 개운했다. '이 맛에 설거지를 하는 거지. 이거지.'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주방을 번쩍번쩍 광이 날만큼 다 치워놓고는 서둘러 두 아이의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그리고는 돌아가며 책을 읽어줬다. 아침먹지 못하고 간 신랑이 떠올랐다. 연락해보니 도착해서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아직까지 밥도 먹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이 익숙하고 따뜻한 곳에서 아이들과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데 신랑이 너무 안쓰러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두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건 나였고, 그는 밥시간도 놓쳐가며 일터에서 일을 쳐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생각하며 차곡차곡 모아 온 행복을 꺼내 쓸 수 있는 현명한 아내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이제껏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리며 행복한 하루를 보 것이다.


굽는 내내 노릇하게 구운 고구마를 먹는 달콤한 상상을 했었는데 고구마 어느새 노릇하게 구워졌다. 요즘 바나나 차차에 푹 빠진 둘째게도 티브이로 바나나 차차를 틀어준 후 잠시만이라도 내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컴퓨터를 켜며 잘 구워진 고구마와 함께 얼음 동동 띄운 아메리카노를 차려 놓았다. 둘째가 보는 바나나 차차 노래와 첫째 아이가 보는 유튜브의 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했지만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었다. 내 최애 간식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 먹을 수 있 찰떡궁합인 구수하고 씁쓸한 아메리카노까지 내 눈앞에 다. 잠시나마 글도 쓸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일요일에 그가 집에 없다는 게, 집을 어지럽힐 사람은 많은데 치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집이 너저분하다는 게,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가 가득 쌓여 있다는 게 내게 우울을 안길 수는 없. 모든 건 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고, 나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다음에도 이 방법을 쓰기로 했다.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주저 없이 고구마를 가지러 갈 것이다. 그리고 고구마가 익어가는 40분 동안 내 머릿속을 고구마의 달콤함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 고민이 일의 순서에 관한 것이었다면, 일의 순서가 절로 윤곽을 잡을 것이고 육아에 관한 것이라면 앞으로 같은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것이다. 나는 오늘 고구마와 함께 행복을 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지런히 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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