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Mar 07. 2022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왜 엄마만 오지 않았냐고 탓하지 않는 아이.

나는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가정통신문에 전원 참석 요망이 적혀있었더라면 갔을 것이다. 하지만 12시 반부터 1시 반 사이에 와서 주차장에서 사진을 찍고 그대로 하원을 하거나, 불참 시에는 원에서 정상적으로 하원을 돕는다고만 적혀있었다. 그걸 보고 확진자가 느는 시점에 주차장에서 찍을 사진 몇 장을 위해 3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 신랑이 아파 입원을 하며 월차를 당겨 쓴 바람에 신랑 참석을 못 할 예정이었다. 가지 않아도 될 이유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실 갈 걸 그랬나 싶을 만큼 하루 종일 아이 생각 했다. 아이 생각만 났다. 아빠가 함께 오지 못했더라도 엄마와 동생만으로도 충분했을 아이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나는 나 같은 엄마가 많을 줄 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나도 아이 친구의 엄마처럼 사탕 꽃다발을 가지고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로 남게 되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기 두 달 전, 아이가 이제 학교도 가야 하는데 집에 오는 것쯤은 혼자 해보겠다고 선언했다. 집 바로 밑에 유치원 차가 서기는 했지만, 엄마의 마음은 또 달랐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렸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만 해도 아이는 정말 부쩍 자라 있었다.


아이의 졸업식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아이는 현관문을 열고 혼자 들어왔다. 미안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 나가 아이를 맞이했는데 자그마한 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유치원에 있는 짐을 돌려보낸다  그날은 마중을 나갔었는데 짐이 그게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당장 아이의 손에 있는 짐을 옮겨 내렸다.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 짐에 "헉"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안한 마음에

"짐 밑에 두고 엄마 부르지, 이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다 들고 왔어." 하고 물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거 별로 안 무겁던데.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하고 말했다.

적어도 졸업식 날이었는데, 원에는 못가도 밑에까지는 내려갔어야 했다. 신청했던 졸업 액자가 아직 우리 집에 없으면 유치원에 가는 마지막 날 가지고 오겠지 언제 가지고 오겠냐는 생각도 못 한 바보 같은 나였다. 나라는 엄마는 왜 이리 실수투성이인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보다 더한 실수를 오늘 안에 할 수 있겠나 싶었고, 아이에게 이미 미안한 마음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아이반 24명 중 사진 찍는 시간이 지나고도 남은 아이 4명이 다였다고 했다. 그것도 우리 아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아이는 내게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핑계라도 대야 했다.     

“엄마도 가려고 했는데 어제 복덩이랑 얘기했던, 코로나가 심한데 모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제 마지막 날이라 친구들을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는 게 복덩이한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고 말을 했다. 비겁한 변명 같아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이는 가만히 내 말을 듣더니

"엄마를 보면 화내려고 했는데 엄마를 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네. 엄마 말이 맞네"하고 말했다.

그 말에 미안하던 내 마음도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던 내 마음도 마법같이 진정이 되었다. 복덩이도 남은 세 명과 노는 게 재밌었다고 했다. 교실을 떠나기 전에 유치원에 뭔가를 해주고 싶어 교실을 청소하는 놀이를 했다고 했다. 하는 내내 친구들과 함께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집에서도 가끔 유리나 바닥을 닦는 걸 놀이처럼 하는 아이라 그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는 내가 오지 않은 걸 별 것 아닌 일로 여김으로써 외로움이나 소외감, 서운함, 배신, 분노 등으로 채울 수 있는 감정을 그리되게 두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을 아주 알차고 재밌게 보내주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렸을 적에도, 서른여섯이 된 지금도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렸을 적 비가 오는 날이나 운동회 때 엄마가 오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종종 서운해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키운 여덟 살짜리 아이는 달랐다. 내가 못했던, 아직도 못한 그 어려운 걸 하고 있었다. 


복덩이가 어렸을 적이 떠올렸다.

‘그래. 복덩이는 정말 아기 때부터 무던한 아이였지. 나는 그런 복덩이를 키우면서 고마울 때가 참 많았지.’ 하고 말이다. 아기 때부터 카시트를 타도 울지 않았고, 뭔가를 사달라 떼를 쓰며 운 적 없었다. 내가 골라 준 옷 그대로 불평 없이 늘 입어 주었고, 밥도 거르지 않고 야무지게 다 먹어 주었다. 뭐든지 함께 하는 걸 좋아해서 같이 해주기만 하면 늘 싱글벙글했다. 나를 닮아 잔 걱정이 많지만, 감성적인 복덩이는 내 마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정도로 다정한 말을 자주 해주었다. 때때로는 엄마인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라게도 했다.


은 동생이 복덩이가 먹고 있는 밥을 탐낼 때 주지 않는 걸 보고 좀 나눠 먹으라고 질책하듯 말한 적이 있다. 아마 그때 복덩이가 나처럼 대답했다면 우린 감정이 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복덩이는 그러지 않았다. “동생이 밥을 자꾸 먹으면 엄마가 다시 밥을 퍼서 김밥을 만들어 와야 해서 힘들잖아. 그래서 그랬어 내가.”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보고 나도 좋게 얘기할 걸 후회가 되었다. 동생과의 사이에서 억울한 일이 있을 때도 복덩이는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계속 복덩이를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어서 피했을 뿐인데 동생이 운 적이 있었다. 나는 우는 소리만 듣고 나가 오해를 했고 복덩이에게 좀 사이좋게 놀 수는 없냐고 했는데, 복덩이는 내게 따지거나 화를 내지 않고 "아빠"하며 아빠를 찾으러 갔다. 그리고서는 차분하게 아빠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를 탓하는 대신 자신보다 내게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아빠를 찾아간 게 정말 대견했다. 천방지축 복숭이가 내게 심한 장난을 칠 때면 우리 둘 사이를 막아서고 말리다가 그래도 안 되면 차라리 자신에게 그러라며 팔을 내어주던 복덩이의 행동도 잊을 수 없다.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고 다른 이의 감정을 다독이고 달랠 줄 아는 따뜻한 아이이다. 그런 복덩이의 졸업식에 내가 알아서 꼭 갔어야 했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미안한 마음에 둘러대기 바빴던 나를 아이는 그 작은 몸으로 보듬어주기까지 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마음만은 태평양같이 넓은 아이가 날 품어주는 게 아닐까, 날 성장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가 가져온 것들을 꺼내보며 아이보다 더 신이 났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벌써 졸업을 한다니 뭉클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도 뒤돌아 몰눈물을 닦는 궁상을 떨었다. 아이 가져온 가방에는 부담임 선생님이 선물로 준 먹기에도 아까운 예쁜 쿠키와 손편지도 들어 있었다. 친구의 엄마가 준비해준 과자도 있었고 원에 선물한 사진을 보관할 수 있는 커다란 앨범과 아기자기한 모양이 그려져 있는 아동용 텐트도 들어 있었다. 작고 귀여운 텀블러와 색색의 색연필도 있었다.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찍힌 졸업 액자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상장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졸업 액자에 박힌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아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라 유치원을 졸업하다니.


 상장 4개를 하나씩 자랑할 때마다 뛸 듯이 기뻐해 주었다. 그중에는 자랑스러운 어머님 상도 있었고 졸업증도 있었다. 아이는 상장 하나당 맛있는 요리 하나씩 생기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내게 네 번이나 맛있는 걸 시켜먹을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안 그래도 미안한 게 잔뜩인 나는 당연히 아이의 기분을 맞춰주며 “그래. 그래.”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당연히 치킨, 피자, 떡볶이 같은 걸 말할 줄 알았는데 4개를 다 라면에다 쓴다고 했다. 그 허례허식 없음에, 순수함에 또 웃음이 났다.          


내 품에 목도 가누지 못하고 안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을 하지 못하고 몸짓으로만 말을 해도 나만 알아볼 수 있었던 그때가 어제 같은데 그랬던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수한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게 해 준 아이는 내게 정말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매일같이 속삭인다. "엄마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한테 복덩이처럼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가는 없어.", "아니야. 엄마가 더 사랑해."하고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점점 더 알게 됐다.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아이에게 억울한 감정이 들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는 건 물론이고 이번 일같이 내가 반성을 할 일이 있으면 하고, 다음에는 아이에게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배우고 고쳐나가는 그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아이가 앞으로 커가면서도 이런 성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가 잘해야 한다. 나만 잘하면 된다.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또 실수를 통해 배움을 얻었다. 상상도 못 했던 예쁘고 어여쁜 말로 내 마음을 늘 봄날같이 만드는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게 과분하다. 나는 친구같이 편안하면서도 늘 곁을 지키는 든든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아이의 진심을 외면하지 않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오늘 아이에게 고백하고 싶다. 이렇게 부족한 내게 이리도 과분한 네가 와주어 매 순간이 기적 같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네가 날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가 주겠다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행복을 고구마와 함께 구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