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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Mar 21. 2022

우리 아이만 코로나 검사를 받지 못했다.

회사 근처에 얻은 집 계약이 끝나며 9개월의 주말부부 생활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사 온 바로 다음날 신랑이 코로나에 걸려 버렸다. 부랴부랴 남은 가족도 집에서 자가진단키트를 해보았는데 모두 음성이 나왔다. 이제야 완전체 가족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우리는 다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날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당장에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등교 정책이 내일모레 월요일을 기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월 14일 전에는 동거인이 코로나에 걸리면 아이는 일주일간 집에서 격리를 하면 됐었는데, 14일부터는 동거인이 확진이 돼도 아이가 음성이 나오면 학교에 가야 했다.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였지만, 둘째 일주일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바뀐 정책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나 아빠 중 한 명이 확진이면 아이도 확진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검사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음성 일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학교에 간다고 해도 방과 후 수업과 당장 월요일부터 다니려고 한 태권도 학원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이를 보내야 하나..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간 학교에 가지 않거나, 원격 수업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책은 이미 정해졌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혹시나 우리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가 걸릴 수도 있으니 계속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불을 끄고 눕기 전까지, 채에 걸러진 이물질처럼 한 없이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잠시도 쉴 수 없었다. 격리된 신랑의 밥을 챙겨야 했으며, 아이들을 챙겨야 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건 평소에도 힘에 부쳤지만 그날은 특히 더 힘이 들었다.


신랑과 아이들을 챙긴다고 내가 아픈 건 12시가 넘어 불을 끄고 누운 후에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 생각했던 몸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근육이 동시다발적으로 욱신거리고 아팠다. 통증 때문에 잠도 들질 못했다. 결국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약을 먹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자가진단키트가 음성이 나왔다고 해도 동거인이 확진이 되었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바로 다음날, 아이 둘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전날 검사를 했을 때 셋다 음성이었으니 당연히 음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면 바로 내일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마음이 심란했다.  


병원은 앉을 곳도 없을 만큼 아수라장이었다. 진료실 앞마다 사람 한 명 지나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내 앞에는 26명의 대기인원이 있었다. 통제가 쉽지 않은 어린아이 둘과 오랜 시간을 대기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대기 시간만 잘 버티면 괜찮을 거라 마음을 다독였다.


아이 둘을 번갈아 어르고 달래며 한 시간 반쯤을 기다렸나,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다. 검사실로 가서 검사를 받고 15분만 더 기다리면 이제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검사실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내 코에 면봉이 들어갔고, 둘째 아이의 코에 면봉이 들어갔다. 제법 깊숙이 찔러 나도 고통스러웠는데 둘째는 찡그리는 것 하나 없이 검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첫째의 차례였다. 이제 이것만 끝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첫째가 코로나 검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첫째는 이런 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학 일주일 전, 첫째는 소파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다친 바로 그날 병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울며 불며 극렬히 저항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파스를 듬뿍 바른 후 얼음찜질을 했었다. 그 후 4일을 땅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거나 무릎으로만 기어 다녔다. 매일같이 걸으려고 도전조차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지만 아이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병원에 가자고 할 때마다 그전까지 불편하다는 발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잡아떼기까지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대로 걷지를 않았다. 이틀 후면 나을 거다, 내일이면 이제 제대로 걸을 거다 장담만 하고 시간이 지나도 전혀 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속이 정말 몇십 번은 뒤집어졌다 애가 탔다 화딱지가 났다. 결국 입학 전날까지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다 그제야 발목이 정말 아픈 게 맞다고 실토했다. 부랴부랴 병원에 데려갔지만 CT 결과는 몹시 깨끗했다. 하지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다친 지 일주일 째가 입학날이었다. 아이는 그전날보다 더 제대로 걷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경악하게 했고, 이때까지 아이의 말을 믿어줬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니 아침부터 집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학식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줄을 선 아이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는 내 인사를 눈을 흘기는 걸로 답했다. 그 후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살은 많은데 양심의 가책은 없는 모습이었지만, 입학식 날이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만난 아이는 기분이 많이 풀려 있었다. 제대로 풀어주기 위해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켜서 점심을 먹었는데 결국 나는 체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이의 엄살이 나아지질 않는 모습에 너무 열 차이고 화가 나서, 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체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날 아이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데려갔을 때 아이의 발목에는 사인펜 자국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어제보다 더 모르겠다며 표시를 해둔 거라 했다. 그런데 의사분이 그곳을 눌러도 아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이젠 정말 백 프로 엄살이었다.


그보다 더 어렸던 다섯 살 적에는 아무렇지 않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서지를 못하겠다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한참을 엑스레이 결과 사진을 지켜보던 의사분이 당장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희귀병인 거 같다며 한시라도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그곳이 곪아서 뼈를 도려내야 하며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 것이라 했다.


대학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헐레벌떡 갔고, 응급실에서 우리는 수술을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들어가야 하며 많이 어려서 위급 상황이 올 수 있으니 코에 호흡기를 끼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레지던트 의사분도 그 병이 맞다면 한시바삐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큰 수술이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우리는 떨고 있었고, 울고 있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그 수술을 받으려면 적어도 6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미 3시간을 넘게 응급실에 있었던지라 아이는 지쳐 있었다. 우리는 섣불리 그 위험한 수술을 시킬 자신이 없었다. 하루만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다시 한번 진료를 받아보기 위해 대학병원 진료실로 갔다. 그리고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진단을 받았다. 아이를 본 의사 선생님은 경력이 정말 오래되신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질문만 하고 바로 진단을 내리셨다. 평소보다 격한 운동으로 인해 근육이 긴장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는 병이라고 농담까지 하셨다. 우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한 치 앞도 불 수 없을 만큼 짙었던 안개가 단번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기적 같았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술을 감행했을 텐데 그래서 멀쩡한 뼈를 파냈을 텐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여하튼 우리 아이는 그때부터 그랬다. 근육의 긴장을 극대화된 엄살로 표현하는 바람에 또 거기다 두 의사분이 오진을 하는 바람에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렇게 굵직한 사건들 말고도 엄살에 대한 일화가 너무 많아서 다 적을 수도 없다.


그랬기에 처음 검사를 거부할 때까지만 해도 '그래 이 정도는 마음먹고 왔잖아, '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아이를 더 잘 설득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건 내 오만이었다. 아이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제발.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하고 빌 때도, 정말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고 이 검사는 꼭 받아야 하는 거라고 설득을 할 때도 듣질 않았다. 검사를 하시는 분들께도 죄송하고 뒤에 기다리는 분들께도 죄송했다.


그래서 우리는 검사를 실패할 때마다 바로 검사실에서 나와 다시 아이를 설득했다.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지만 한 손에는 둘째를 안아 든 채 첫째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설득에 설득을 한 끝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검사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 실패했다. 정말 검사실에 있는 분에게는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고, 아이에게 또 오만가지 감정이 다 들었다. 온 힘을 다해 거부하는 아이를 잡아 보아도 미꾸라지처럼 일초도 안 돼 빠져나가 버리니 더는 희망이 없었다. 내 마음이 산산조각이  난 했다. 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정신적으로도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다섯 번의 시도 끝에도 아이가 검사를 거부하자 나는 둘째와 나의 결과만 듣고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검사 결과도 충격적이었다. 내 예상을 빗나가서 둘째와 나 둘 다 양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침도 먹지 않고 간 병원에서 집에 돌아온 건 오후 한 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신랑을 보는 순간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을 신랑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와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아이와 말을 하기 시작한 건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집에 와서 내내 미안하다던 아이가 내 공격적인 말투를 듣고는 그거 하나 가지고 너무 심하게 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가 내게 그 말을 한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일관되게 미안하단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에게 화가 난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평생 보이지 않아도 될 모습을 보인 게 화가 난 건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받지 못하고 돌아가게 돼서 화가 난 건지,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을 경우 학교에 내야 할 서류가 필요한데 그걸 받지 못해서 화가 난 건지를 말이다.


나는 유독 남을 의식하며 살아왔었다. 내가 커 온 환경의 영향이 컸지만, 그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던 터라 우리 아이에게만큼은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그런 엄마가 되어 있었다. 혹시 코로나가 걸렸는데도 검사 결과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어올 틈도 없이 그저 검사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이에게 머리끝까지 화 나 있었다.


왜 나는 끝까지 참지 못하고 끝끝내는 아이의 등을 한 번 내려치기도 했으며 하지 않으면 집에 함께 갈 수 없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을까. 하물며 다섯 번째에는 아이에게 검사실에 같이 들어가지 않겠다 어깃장까지 났다. 어차피 가도 또다시 그곳에서 온갖 몸부림을 치 거부를 하고 사를 하지 않을 텐데 너무 실망스럽고 화가 나서 따라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8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인데. 내가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옳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가족 모두 양성이면 이 아이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갈 사람이 없다는 걸 걱정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여덟 살 아이 앞에서 더 어린아이 같이 화만 내고 있었다. 모두가 다 하는 검사를 왜 우리 아이만 못하는지 아이를 원망했다.


일면식도 없는 그 낯선 공간에서, 아는 사람은 나뿐인 그곳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 앞에서 아이의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을 걸 생각하니 내 행동이 원망스러웠다. 설사 이 세상 모든 아이가 다 검사를 받았더라도 나는 우리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됐다. 나는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해주어야 할 엄마였으니까.


나는 아이의 기질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속상하게 할까 탓하기만 한 게 다였다. 아이는 병원에서 내가 자신을 탓하는 동안 검사의 공포 나의 날 선 말들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이의 공포를,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다독이는 그 과정이 우리 관계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다. 살이 되었으니 이 정도는 무리 없이 야 한다는 내 기준이 나를 망쳤다.


이는 다른 어떤 부분에서는 여덟 살 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일 때가 는데 그건 당연했고, 이건 탓해야만 했을까. 이제껏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세심하 자상한 면이 날 웃게 할 때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은 언제나 내게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 면으로 인해 둘째가 첫째를 따르는 동안 잠시지만 매일 조금씩 내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는 그렇게 매일 내 곁에서 자신의 타고난 기질로 날 기쁘게 해 주고 감동을 주었는데 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살이 심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잘 보호하고 아낄 줄 알아 이제껏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적이 없었던 아이였는데, 내 욕심은 어째서 자꾸 하늘을 찌르려고 하는 걸까. 이제껏 나는 아이의 그 기질로 인해 아이에게 받은  많은 엄마였으면서도.


아이는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타고난 기질이 한 번에 바뀌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번에도 비슷한 일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만 하지 말고 또 너무 자책만 하지 않고 그때가 되면 아이의 마음부터 읽어줄 줄 아는 엄마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내 감정, 내 마음보다 아이의 속마음을 가만히 들여볼 것이다. 아이가 할 말이 있다면 몇 시간이고 아이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아이를 기다려 볼 것이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엄살 부분에서도 빠른 내 속도와  조금은 느린 아이의 속도가 만나는 지점이 분명 생기겠지. 난 그 지점을 믿는다. 아이와 내가 하나 되는 그 지점 말이다.


나는 이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아이로 인해 매일 조금씩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내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는 매일이 기적 같은 존재이다. 이 아이를 정말 잘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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