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하는 사람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살면서 받은 가장 기적 같은 선물.
내게도 산후우울증을 겪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밥을 먹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뭐 하나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딜 가도 늘 아기가 따라왔고, 그렇지 않은 날조차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제대로 잠을 자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비몽사몽 한 정신에도 아이의 날 선 울음에 몸을 일으켜야 했고, 아이가 눈을 부친 후에도 무너진 자율신경 때문에 편히 있질 못했다. 온몸이 열병을 앓듯이 자주 아팠고, 잠이 와 죽겠으면서도 두 눈은 말똥말똥했다. 낮과 밤의 경계도 나와 아이의 경계선도 모든 게 무너지는 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면 내 의사와는 다르게 눈물이 났다. 밝은 낮에도 나에게만 먹구름이 드리운 것같이 우울했다. 아이를 낳고 변한 몸만큼 기분까지 시시때때로 달라져 감당하기가 벅찼다. 그토록 밝고 수다스럽던 내가 어느새 울보가 되어 있었다.
그 시기 신랑은 날 데리고 드라이브를 시켜준다며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엄마의 연수원으로 갔다. 몇 시간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밖은 이미 캄캄했다. 나는 홀린 듯 창문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밖은 온통 시멘트 건물로 가득해. 숨이 막혀."
하루아침에 집 밖 풍경이 달라질 리 없는데 그 말을 하며 가슴 쪽 옷을 주어 뜯기까지 같다. 방금 전까지 자연을 보여주고 숨통을 트여 놓았는데 오자마자 밖을 보며 답답하다고 울기나 하다니, 내가 신랑이었어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신랑의 애를 태우다 내가 다시 한 말은 "돌아가고 싶어"였다. 신랑이 "자고 갈래?"라고 물었을 때는 집에 가겠다고 해놓고 집에 오자마자 다시 돌아가겠다니. 나는 계속 울고 있었고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더 기가 막히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신랑은 그런 날보고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우는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나도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여주었다.
"가고 싶어? 그럼 가자"
그가 말했다. 마침 지금 출발하는 게 그날의 첫 외출이었던 것처럼, 연수원에는 다녀온 적도 없었던 것처럼 신랑은 그리 행동했다. 왜 그러냐고,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따라나섬이 산후우울증의 탈출구를 향한 걸음이었을까. 홀린 듯이 그를 따라나섰던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우울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이후로 기분이 변덕스럽게 바뀌는 것과 우는 것이 함께 발현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시골 출신인 신랑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시골에 살면서 제일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내 논에 물이 들어올 때야." 그는 이어 "내 논에 물이 들어오는 것만큼, 아가 입에 맛있는 게 들어가면 좋아."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논에 물이 들어오는 것과 내 입에 음식이 들어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당시 논과 밭을 구별하지도 못할 만큼 무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느낄 수 있었다. 곡식이나 식물이 자라는데 물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에 물을 주는 것만큼이나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게 좋다니.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 나를 이만큼이나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에게 고맙기만 했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살도 빼지 못하고 있는 내게, 그런 말을 건네는 신랑에게 고마운 마음을 넘어 믿음까지 생겼다. 이 사람은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줄 사람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는 살면서 내게 늘 그런 존재였다.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줘서 아이를 낳고 달라진 내 몸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소에도 그는 내게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잔소리 대신 자신의 몸을 움직여 상황을 정리했다. 또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거라도 내가 좋아하면 취향을 존중해줬다. 예를 들어 신랑은 빵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자다가도 빵을 준다고 하면 벌떡 일어날 만큼 빵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차로 집을 나설 일만 있으면 빵 맛집을 검색했다. 신랑 입장에서는 요즘 빵이 한 끼 식사보다 비싼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내가 탐탁지 않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신랑은 목적지를 알려달라 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세워두고 아가들과 나를 차에서 쉬게 하고 본인이 미리 주문한 빵을 가져다주었다. 정작 그런 본인은 빵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독 쿵작이 잘 맞았다. 계획을 세워서 얘기하면 "거긴 좀."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도 성격이 둥글둥글한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최우선으로 여겼다. 목적지를 정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른 곳의 장점을 먼저 봐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길치여서 숙소에서 관광지까지나 음식점까지의 위치가 터무니없이 먼 곳을 검색해 놓을 때가 잦았는데 그런 곳조차 찾아낸 걸 먼저 칭찬해주고 상황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그를 이토록 믿고 의지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그의 공이 컸다. 그는 작은 약속이라도 뱉은 말은 꼭 지키려 노력했고, 사소한 말도 놓치지 않고 늘 공감해주고 챙겨주었다. 그런 그와 나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질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늘 배울 점이 보였다. 내게 자랑할만한 일을 했으면서도 생색내지 않았고,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공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차츰차츰 둥글어졌다. 그와 사는 내내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