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Jul 12. 2022

반대하는 사람과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살면서 받은 가장 기적 같은 선물.

내게도 산후우울증을 겪던 때가 있었다.  시절 나는 밥을 먹 것도, 화장실 는 것도 뭐 하나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딜 가도  아기가 따라왔고, 그지 않은 날차 아 울음소리가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제대로 잠을 자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비몽사몽 한 정신에도 아이의 날 선 울음에 몸을 일으켜야 했고, 아이가 눈을 부친 후에도 무너진 자율신경 때문에 편히 있질 못했다. 온몸이 열병을 앓듯이 자주 아팠고, 잠이 와 죽겠으면서도 두 눈은 말똥말똥했다. 과 밤의 경계도 나와 아이의 경계선도 모든 게 무너지는 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면 내 의사와는 다르게 눈물이 났다. 밝은 낮에도 에게만 먹구름이 드리운 것같 우울했다. 아이를 낳고 변한 몸만큼 기분까지 시시때때로 달라져 감당하기가 다. 그토록 밝고 수다스럽던 내가 어느새 울보가 되어 있었다.


그 시기 신랑은 날 데리고 드라이브를 시켜준다며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엄마의 연수원으로 갔다. 몇 시간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밖은 이미 캄캄했다. 나는 홀린 듯 창문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밖은 온통 시멘트 건물로 가득해. 숨이 막."


하루아침에 집 밖 풍경이 달라질 리 없는데 그 말을 하며 가슴 쪽 옷을 주어 뜯기까지 같다. 방금 전까지 자연을 보여주고 숨통을 트여 놓았는데 오자마자 밖을 보며 답답하다고 울기나 하다니, 내가 신랑이었어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신랑의 애 태우다 내가 다시 한 말은 "돌아가고 싶어"였다. 신랑이 "자고 갈래?"라고 물었을 때는 집에 가겠다고 해놓고 집에 오자마자 다시 돌아가겠다니. 나는 계속 울고 있었고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더 기가 막히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신랑 그런 날보고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우는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나도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받아들여주었다.


"가싶어? 그럼 가자" 

그가 말했다. 마침 지금 출발하는 게 그날의 첫 외출이었던 것처럼, 연수원에는 다녀온 적도 없었던 것처럼 신랑은 그리 행동했다. 왜 그러냐고,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따라나섬이 산후우울증의 탈출구를 향한 걸음이었을까. 홀린 듯이 그를 따라나섰던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우울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이후로 기분이 변덕스럽게 바뀌는 것과 우는 것이 함께 발현된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시골 출신인 신랑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골에 살면서 제일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내 논에 물이 들어올 때야." 그는 이어 "내 논에 물이 들어오는 것만큼, 아가 입에 맛있는 게 들어가면 좋아."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논에 물이 들어오는 것과 내 입에 음식이 들어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을 했다. 나는 그 당시 논과 밭을 구별하지도 못할 만큼 무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느낄 수 있었다. 곡식이나 식물이 자라는데 물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에 물을 주는 것만큼이나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게 좋다니.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 나를 만큼이나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에게 고맙기만 했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살도 빼지 못하고 있는 내게, 그런 말을 건네는 신랑에게 고마운 마음을 넘어 믿음까지 생겼다. 이 사람은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줄 사람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는 살면서 내게 늘 그런 존재였다.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줘서 아이를 낳고 달라진 내 몸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소에도 그는 내게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잔소리 대신 자신의 몸을 움직여 상황을 정리했다. 또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거라도 내가 좋아하면 취향을 존중해줬다. 예를 들어 신랑은 빵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자다가도 빵을 준다고 하면 벌떡 일어날 만큼 빵을 너무너무 좋아다. 차로 집을 나설 일만 있으면 빵 맛집을 검색했다. 신랑 입장에서는 요즘 빵이 한 끼 식사보다 비싼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내가 탐탁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신랑은 목적지를 알려달라 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세워두고 가들과 나를 차에서 쉬게 하고 본인이 미리 주문한 빵을 가져다주다. 정작 그런 본인은 빵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독 쿵작이 잘 맞았. 계획을 세워서 얘기하면 "거긴 좀."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도 성격이 둥글둥글한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최우선으로 여겼다. 목적지를 정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른 곳의 장점을 먼저 봐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길치여서 숙소에서 관광지까지나 음식점까지의 위치가 터무니없이 먼 곳을 검색해 놓을 때가 잦았는데 그런 곳조차 찾아낸  먼저 칭찬해주고 상황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그를 이토록 믿고 의지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그의 공이 컸다. 그는 작은 약속이라도 뱉은 말은 꼭 지키려 노력했고, 사소한 말도 놓치지 않고 늘 공감해주고 챙겨주었다. 그그와 나는 한 살 차이밖에 나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늘 배울 점이 보였다. 내게 자랑할만한 일을 했으면서도 생색내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공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차츰차츰 둥글어졌다. 그와 사는 내내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다.










작가의 이전글 자기 전, 숙제가 있다고 말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