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Aug 09. 2022

시어머니에게 택배를 하나라도 더 보내려는 이유.

해드리고 후회한 적은 없음을 기억했다.

나는 내가 받고 았던 게 있으면 아끼는 사람 떠올렸다. 내가 느낀 기쁨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획할 때 내가 더 설레었고, 깨어있을 때나 잠이 들었을 때 모두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행동에 옮길 때는 온몸에서 환희의 스위치가 켜졌다. 어머님께 무언가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님이 기뻐하실 생각에 나의 하루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평소에는 내가 먹어본 것 중 유독 맛있게 느껴지는 것들을 종종 부쳤다. 우연히 먹어 본 제주도 프리미엄 귤도, 손이 떨려 사 본 적 없는 두께만큼 가격까지 부풀었던 뚱카롱도 부쳤다. 초코파이로 유명한 제과에는 전병도 그리 달지 않고 맛있었는데 그것도 사서 부쳤다. 갈비에서 모시송편까지 다양한 먹거리들이 부쳐졌다. 대게 유행하는 디저트들, 몸에 좋은 과일, 맛있는 음식 같은 걸 부쳤는데 딱 내 수준에 맞는 것들이라 두 분은 받으시고 소소해서 웃음이 나오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내게 들려주시는 두 분의 말씀만 믿기로 했다. 가끔은 유치한 것들에 콧방귀를 뀌셨을지도 몰라도 말이다.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 해도 두 분은 참 현명하신 거 같았다. '뭘 이런 걸 부치냐'는 핀잔이나 '이건 내가 평소에 즐기던 게 아닌데'라는 실망스러운 말을 들었다면 지금보다 더 뜸해졌다가 결국 보낼 용기마저 잃었을 것이다.


여름에는 국부터 밑반찬까지 반찬을 골고루 부쳤다. 나도 더워 죽겠는데 두 분은 오죽하실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더운 날씨에 입맛도 없으실 터였다. 비록 내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두 분의 일손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반찬이 떨어질 때쯤 다시 시키고, 시키고를 반복했다.


결혼 후 신랑의 첫 생일날에는 돈 꽃바구니가 시부모님께 가도록 주문해 놓았다. 신랑을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한 일이었다. 평일이라 직접 갈 수가 없어 배달 업체에 맡겨야 했다. 먼 곳에 꽃배달을 해보는 건 처음이라 업체 선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예약을 해놓고도 시골이라 제 날짜에 제대로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다행히 돈 꽃바구니는 무사히 두 분께 안겨졌고, 나는 그제야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내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갱년기를 겪고 계셨다. 나는 엄마를 보고서야 여성들이 그맘때쯤 겪는 거라는 걸 알았는데, 가족들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머님께 혹시 갱년기를 겪고 계시는 거냐고 조심스레 여쭤 보았다. 역시 그랬고, 나는 어머님이 갱년기로 인해 겪는 불편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때부터 건강기능식품을 보던 것 같다. 아버님께는 간에 좋은 걸 꾸준히 보냈다. 그걸 드시면 두 분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건 상상만으로도 너무 슬픈 일이기에 두 분의 건강을 챙기는 건 어느새 내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족 중 내가 먼저 갱년기를 알아차린 후부터였을까. 그 후로 어머님을 샅샅이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무지 외반증을 겪고 계시는 걸 발견했다. 조금만 튀어나와 있어도 없어야 될 게 있는 거니까 불편하고 아프실 텐데, 저렇게 투박하고 크게 튀어나와 있다니.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나는 그 길로 무지외반증이 있어도 조이지 않고 덜 아플 신발을 찾았다. 그리고 부쳐드렸다. 편하게 잘 신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한 번은 어머의 환갑을 앞둔 때였다. '프러포즈 이벤트처럼 꽃길을 만들 한복판에는 초로 하트 만들면 어떨까. 그 안에는 선물을 넣어놓을까' 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때 둘째가 한 살이었는데 한 살 배기 아기를 데리고 그 일을 한다는 건 너무 과한 일이었다. 결국 밀키트를 사서 한 상을 차렸다. 팔을 걷어붙이고 하는데도 족히 30분 이상이 소요됐다. 그래도 차리고 나니 푸짐하고 색상도 예뻐서 꼭 상에 꽃밭이 펼쳐진 것 같았다. 풍선 속에 꽃이 든 것도 준비했다. 꽃이 든 풍선 밑에는 풍선을 바치는 상자가 있었는데 그 상자에 있는 비닐을 잡아당기면 돈이 술술 딸려 나왔다. 그것 또한 내 아이디어였다. 


어느새 어머님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건 내게 즐거운 일이 돼있었다.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응당 해야 할 일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가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보면 인자하다 못해 하회탈 웃음을 지어 보이시는 아버님은 열외로 치고서라도 말이다. 환희와 기분 좋음은 점차 더 확대되어 갔는데 그 불을 지피는 건 늘 신랑이었다. 신랑의 고맙다는 말은 네게 '이리도 아끼는 자기가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우리 엄마까지 신경을 써주고. 자기 같은 사람은 정말 없어.'라고 들렸다. 어머님께 작은 마음만, 쪼끔 한 성의만 보여도 신랑이 항상 내게 그 비슷한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모르는 눈치다. 내게는 세상에서 둘 도 없는 신랑을 있게 한 감사한 분이기에 당연한 거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나를 복덩이로 여기는 분께 박 씨를 더 물어다 드리고 싶마음 또한 당연한 거였다. 내 선물을 받는 그 순간만큼은 어머님께서 나이도 잊으시고 소녀같이 설레고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그거면 충분했다. 순수하신 어머님이 나로 인해 설렘을 느끼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생각 했다. 다행히도 선물을 받은 어머님은 몹시 기뻐하셨고, 그걸 숨기지 않고 다 표현해주셨다.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는 그런 어머님을 사랑했다.


나는 두 분께 무언가를 해드리지 못했을 때 후회된 적이 있지 해드리고 나서 후회를 한 적은 없음을 기억했다. 해드리면 두 분이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제일 좋았다. 가슴이 따뜻해졌고, 온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맑고 화사한 웃음이 주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다. 날 아끼고 사랑해주는 두 분이 가족이 되어주신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나는 알고 있다. 우리를 늘 걱정해주시고 아껴주시는 것에 비하면 내가 마음 쓰는 건 아무 일도 아니. 나는 내가 드린 것보다 받은 사랑이 더 크기에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님은 나를 처음부터 조건 없이 사랑해주신 분이셨다. 신랑과 연애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를 한 번 뵌 이후로는 아주 가끔 만났다. 정말 추운 날 만났던 어느 날 허전한 내 목을 보시고는 시내에서 당장 목도리를 사서 둘러주셨다. 삼계탕 집에 데리고 가 후식으로 나오는 수정과를 눈을 찡긋하고 먹는 날 귀엽고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셨다. 그런데 어머님은 나를 만났을 때뿐만 아니라 만나지 않고 있는 동안에도 사랑해주셨다. 그 당시 나는 일을 했고, 신랑은 아직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여름휴가라도 다녀오라며 돈을 부쳐주셨다. 나는 점점 어머님께 빠져들어 주변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신랑보다 시부모님이 더 좋아서 결혼을 하는 거일 지도 모른다고 말 정도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두 분은 한결같았다. 어머님은 내 생일을 매년 챙겨주시느라 참기름을 짜고 들기름을 짜주셨다. 아버님은 직접 뜯은 쑥으로 주변에 나눠먹으라고 두 박스나 되는 귀한 떡을 해주셨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두 분은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분들이시다.


또 한 번은 직접 말하기 쑥스러워 신랑을 통해 본인이 먹고 싶은 것처럼 잡채가 먹고 싶다 말씀드렸더니 지금까지 갈 때마다 잡채가 6인분 되어 있었다. 평생 별로 좋아하지 않던 잡채가 갑자기 좋아졌을 리 없는 신랑임을 뻔히 아시면서도 며느리 좋아하는 거 하나라도 더 먹이시려고 손수 준비하시는 그 마음을 어떻게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수육에 닭볶음탕에 닭죽에 하나하나 까서 양념을 올린 꼬막까지 다양한 메뉴들로 갈 때마다 정성스러운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거기다 두 분은 시댁임에도 불구하고 며느리가 늦잠을 자는 걸 당연하다 하셨다. 일부러 새벽에 일을 하러 나가봤지만 등을 떠밀 방으로 돌아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기 키우는 것만 해도 힘들 텐데, 평소에 일하러 가면 늦잠도 못 잘 텐데. 어머님, 아버님이 내게 변명거리까지 손수 알려주다. 명절에 가도 어려운 전은 새벽부터 일어나 다 구워버리시고. 철마다 농사지으신 걸 흙까지 다 털어내어 바리바리 싸주셨다. 그런 두 분께 가는 길은 내게 고향에 가는 길처럼 늘 푸근하고 가고 싶은 길이었다. 본인의 아들처럼 나를 귀히 여겨 주시고 어여삐 여겨 주시어 늘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나는 두 분을 위해 택배를 쌀 것이다.  마음을 전할 든든한 버팀목이 계셔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늘도 마음으로 기도한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어머님, 아버님.

작가의 이전글 평등한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