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너의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엄마가 되길
가끔은 그 다짐이 퇴색되어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아픔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평소와 아무것도 다를 게 없던 일상에서 둘째가 아프기 시작할 때도 그랬다.
아프기 바로 전날, 주말만 기다렸던 우리는 지역을 벗어나 다른 도시로 갔다. 미리 어린이 박물관도 예약해 놓았고 남는 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거나하게 놀기 전 시장에서 닭을 한 마리 튀겨 차 안에서 옹기종기 뜯어먹었다. 최대한 찬바람을 덜 쐬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우리만의 추억이 하나 더 늘었다. 배도 부르겠다 모자부터 두꺼운 옷까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산책을 하러 나갔다. 나가자마자 알았다. 바람이 심상치 않다는 걸. 그 바람을 맞으면 봄도 한 발짝 물러나겠다 싶을 만큼 매섭고 찬 바람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기다린 주말인데. 자꾸만 욕심이 났다. 아이가 아프고 난 후 내가 이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이가 이렇게까지는 아프지 않았을까 헛된 상상을 했다. 마침 실내 마스크도 해제된 터라 우린 마스크를 훌훌 벗어던지고 아주 찬바람도 뚫고는 신나게 놀았다.
산책로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를 보는 게 아이들에게는 하이라이트인데 잉어가 한 마리도 없었다. 날이 너무 추워 실내로 옮겨진 게 아닌가 우리끼리 이야기를 했다. 잉어도 추워서 실내로 가는데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있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무리를 한 게 맞는구나 싶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오히려 찬바람에 옷매무새를 더 단단히 하며 추위와 맞서는 걸 재미로 여겼다. 그동안 날이 추워 정말 오랜만에 한 바깥 활동이었기에 고삐가 풀렸기 때문이다. 산책을 끝내고 어린이 박물관에 갔을 때까지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다. 신기한 광경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신이 나서 놀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이 터졌다. 컨디션이 안 좋은지 둘째 아이가 내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오후쯤 되자온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제대로 먹기능커녕 가끔씩 가래가 섞인 구역질을 했다. 일요일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해열제를 먹이고 품에 안은 채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 세상에 자신의 몸을 의지할 곳이 내 품밖에 없는 것처럼 내 품에만 있었다.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아이를 지켰다.
나는 열이 제일 무서웠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병원에 데려가 약을 받았지만 열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낮이 밤 같고 밤이 낮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코가 막혀 아이는 선잠을 잤고 그마저도 자주 깨서 울먹였다.
아기의 가슴은 정말 작았다. 나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아이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위로를 받았다. 힘든 걸 누르는 게 아니었다. 이 작은 네가 어떻게 될까 봐 두려워 쿵쾅거리는 가슴을 잠재우는 중이었다. 아기가 아프지 않기를 비는 와중에도 아기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맞다. 나는 아이를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몸이 큰 엄마지만, 아이가 열이 차여 손을 떠는 걸 지켜보고 있을 만큼 담이 크진 못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열에 차여 아이가 손을 떨 땐 내 가슴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이가 아프자 나는 자주 속이 좋지 않았다. 잠을 자지 못해서, 칭얼대는 아이를 하루 종일 안고, 업고 있느라고. 아이는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싫다고 소리치거나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그러지도 않을뿐더러 그러더라도 금세 다가와 미안하다며 갖은 애교를 부릴 텐데 끝까지 모른 체를 하며 울며 안아달라고만 했다. 아이의 칭얼거림은 말에도 섞였다. 이미 안고 있는데도 안아달라며 칭얼댔고, 티브이를 틀어줘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딴 거 틀어줘"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런 것들은 내가 노력한다 해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억지를 부리는 아기를 안고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아픈 시간이 길어지며 내 체력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다 괜히 가지지 않아도 될 자격지심이 생겼다. 아이가 아픈데도 일주일에 두 번 자고 오는 걸 꼬박꼬박 지키는 신랑이 미웠다. 왜 아이가 아프면 다 나 혼자 감내해야 하는지 억울도 했다. 뒤돌아서면 신랑도 나만큼 고단하고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오해했다. 그래야 내가 살 거 같았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금세라도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 같이 위태로웠으니까. 나는 정말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는데. 우는 소리를, 짜증을 들어야 하는데. 허리가 부서져도 힘이 들어도 이 아이를 품에서 놓치면 안 되는데. 나는 왜 하면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은 건지 속이 답답했다. 아이가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회사에서 내가 대대적으로 준비하던 행사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생겼다. 나는 아이 때문에 언제든지 일터에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우스운 사람이 돼 어린 건 아닐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란 걸 알면서도, 그런다고 해결되는 게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속이 상했다. 눈앞에 아이는 이렇게 자그맣고 귀중한데. 이렇게 앙증맞고 사랑스러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이 아이에게는 오직 나뿐일 텐데.
이럴 땐 술이 당겼다. 시원한 맥주 한 잔, 순식간에 기분 좋은 알딸딸함을 선사할 소주 한 잔.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절대 한 잔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술은 어디서나 살 수 있다. 조금만 힘들면 쉽게 찾게 될 것이다. 의지하다 보면 의존하게 되고 아이들보다 술과 친해질 줄도 모른다. 나는 첫째 아이를 가지며 아예 그 싹을 잘라버렸다.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고는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습게도 아이가 아픈 동안 내 의지로 되는 게 있다는 게 위로가 됐다.
비빔국수를 먹던 날이었다. 아이는 우리 엄마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내 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날도 아이를 오른손으로 안은 채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왼손으로 하는 서툰 젓가락질 때문이었을까 비빔국수의 면발이 입으로 들어가기 전 얼굴을 때렸다. 아이는 여전히 내게 온몸을 맡긴 채였다. 아이의 세상에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은 내게도 그랬다.
나는 한쪽 볼에 양념을 잔뜩 묻힌 채로 국수의 반 이상을 비웠다. 당장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게 서럽긴 했지만 밥을 편하게 먹지 못하는 것과 아이의 몸이 편하지 않은 건 아마 하늘과 땅차이겠지. 아픈 아이를 꼭 안아 들었다. 그렇게 잘 먹던 아이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게 벌써 며칠 째였다. 밥시간이 됐다고 밥을 먹은 내가, 그마저도 편하게 먹지 못한다고 잠시라도 속상한 마음을 가졌던 내가 철없이 느껴졌다.
아이가 아프고 난 후 아이의 말 한마디에 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할머니는 늦은 시간 건너편에 있는 슈퍼에 가서 밤바람을 맞으며 딸기를 사 왔고 신랑은 퇴근길에 귤을 한 박스나 사 왔다. 나는 부지런히 배를 깎아 나르고 망고를 자르고 키위를 잘랐다. 우연의 일치인지 선물 받은 과일들로 과일이 집에 풍성할 때였는데 아이가 먹질 못하니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 조금만이라도 먹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건강이 얼마만큼 소중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날 밤, 열 시가 다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던 둘째가 갑자기 “라면” 노래를 불렀다. 끓여 먹는 라면도 있었지만 입맛이 없을 땐 컵라면 속 얇은 면발을 더 잘 먹을 것 같았다. 무엇이라도 먹이는 게 우선이었다.
엄마에게 잠시 아이를 맡겨놓고 편의점에 갔다. 이 밤, 거리에 나와 본 게 얼마만의 일이었던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하늘이 밝았다. 몇 분 되지 않는 그 거리를 걸으면 나는 몹시 자유로웠으면 숨통이 트였다. 나 홀로 이 밤에 길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리 자유로울 수 있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만큼 난 늘 아이와 함께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내가 사다 준 라면을 먹고 깎아놓은 배까지 먹었다. 숨구멍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바라고 소망하던 순간이었던가. 배를 씹어 먹는 아삭아삭 소리에 그간 한 걱정이 눈 녹듯 녹아 사라졌다. 식욕이 돌아오며 아이는 건강을 찾아갔다. 내게만 꼭 붙어 칭얼거리던 게 줄어들었고, 혼자 떨어져 노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 글을 정리해서 올리는 지금 왜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는지 모르겠다. 이미 아이가 아팠던 때는 폭풍처럼 지나갔고, 지금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열이 나는 아이를 밤, 낮 없이 돌보며 마음을 졸였던 게 마음속에 각인처럼 남아 있나 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게 열이 오랫동안 난 적이 없었기에 더 놀라고, 더 마음을 졸였었다. 아이가 심하게 아픈 후, 아이에게 아프지 않고 네가 행복하게 잘 크기만 해도 네 몫을 다 하는 거라고 했던 첫 다짐이 떠올랐다.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네 건강과 행복만을 바랄 수 있을까. 가끔은 그 다짐이 퇴색되어 아이에게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가장 최우선으로 하는 그런 엄마로 자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