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도 않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탓일까.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피곤이 몰려온다. 그렇다고 쓰러져 바로 잠이 들 정도는 아닌데 자꾸 눈꺼풀이 무겁다. 평소와 다름없이 잠을 자고, 일어나는 건 같은데 왜 유독 봄만 되면 이렇게 눈꺼풀이 무거울까.
그런데 나는 이 눈에 자주 속는다. 눈꺼풀이 무겁고 눈이 피로한 게 꼭 머리까지 텅 비어버린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데, 눈에 속아 멈추고, 뭔가를 하러 일어나야 하는데 눈에 속아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봄은 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은 계절이다. 어느 생명 하나 귀하지 않고, 예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무거운 눈꺼풀을 자주 커튼 걷듯 가볍게 들어 올릴 때가 있는데 다 이봄의 싱그러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창 밖에 있는 나무들은 가지마다 다 새싹을 돋아내고, 물이 거의 필요 없는 다육조차 싱그러운 자태를 뽐낸다. 이름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들을 눈여겨 봐주지 않으면 너무 서글플 거 같아서 있는 힘껏 생명의 탄생을 지켜본다. 왜 이리 고운지, 왜 이리 찬란한지. 말로 다 담을 수도 없다.
하지만 고작 밖에 나가는 시간이라고는 아이의 등교 시간뿐이다. 그러고는 주말이 되어서야 겨우 밖으로 나간다. 그 정도로는 지금처럼 눈꺼풀을 무겁게 할 수 없다.
나는 자주 영혼 없이 티브이를 본다. 그것도 내가 보고 싶은 프로가 아니라 아이들이 보고 싶은 프로를 본다. 우리 집은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라 티브이만 세대가 있다. 그중 내 몫으로 돌아오는 거라고는 아이들이 다 자는 새벽시간 한 대뿐이다. 그마저도 그 시간이 되면 볼 힘도 남아있지 않아 함께 잠들고 만다.
계절이 바뀌면 당장 아이들 옷이 눈에 띈다. 따뜻해지면 그만큼 얇은 옷을 입어야 하는데 당장 입힐 옷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무보다도 더 쑥쑥 크는 게 지금 시기의 이 아이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의 옷을 면밀히 살펴 장바구니에 담는 동안 눈이 혹사당한다.
실은 나도 옷이 사고 싶은데. 내 옷은 틈이 날 때 잠깐잠깐 보다가 그마저도 작년 이맘때쯤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 보며 개어놓았던 옷들을 찾아낸 걸로 만족한다. 내가 사고 싶었던 옷은 영원히 장바구니에서 잠이 들 것이다.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깔끔하게 이발을 해줬는데 풀 죽어 딱 달라붙은 내 머리는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다. 파마를 하려면 적어도 두 시간을 있어야 할 텐데 9살, 4살 두 아이를 데려가는 것도 앞이 캄캄하고 누군가에게 맡기고 가려니까 또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래도 그걸 서운해하거나 서러워할 새도 없다. 아이를 돌보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고 금세 밖이 어두워지며, 요일과 달, 해의 개념이 무뎌진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벌써 이만큼 자란 게 너무 놀랍고 무서워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라고 생각해 오늘만 조금 덜 놀아주고 쉬어도 되겠지 하고 게으름을 피운 날이 많았는데, 어느새 훌쩍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아이들의 탄생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면서 일상에 지쳐, 피로에 묻혀 자주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눈앞에 가장 반짝이는 존재가 있는데 소중함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보드랍고 몰캉한 살을 가진 아이들. 순수해서 늘 깜짝깜짝 놀라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보고만 있어도 볼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들. 이 아이들을매일 볼 수 있고 안아볼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다행인지를 실은 매 순간 기억해야 하는데.
직장이 먼 신랑이 일주일에 두 번은 집에 오지 못한다고 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라서, 또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인데 나는 하나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서 겨우 겨우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쓸 에너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그저 이런 내 게으르고 부정적인 생각이 그걸 쓰지 않는 것이다.
봄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게 배웠다. 그 무거운 눈꺼풀을 뜰지 말지는 온전히 내 몫이라는 걸 말이다. 눈을 뜨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는데 눈꺼풀이 무겁다는 것만으로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뜨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정말 지치고 힘든 날은 아이들이 태어나던 그 봄 같던 순간을 기억해 내야지. 그래서 아이들을 꽃같이 바라봐야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갈 힘을 오히려 얻을 것이다.
나는 이제 한 발짝 더 성숙해지려 한다.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라 아이들과 함께 이 봄을 만끽할 것이다.
옥상에 함께 가주기만 해도 돌멩이나 삽 같은 걸 하나씩 붙잡고 잘 노는 아이들이니, 놀이터에 가자는 말만 해도 엄마가 최고라고 방긋 웃어주는 아이들이니, 내가 조금만 힘을 더 내어도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한 봄을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