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그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그때 사람의 몸에서 후광이 비치는 걸 처음 보았다.
약속 장소가 백화점 앞이라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흑백사진 속에서 그만이 색을 입고 움직이는 거 같았다.
내 눈에는 그만 보였다.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뭘까?
후에 알게 된 건데 그때 우리를 지켜본 건 서로만이 아니었다. 첫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준비부터 만나는 순간까지 힘이 돼준 친구가 함께 있었다.
내 친구는 백화점 1층 로비 쪽에 숨어서, 그의 친구 두 명은 백화점 반대편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내게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물었다.
내게 맞춰 그가온 거라 나는 웬만하면 모르는 곳이 없었다. 첫 만남에 술은 좀 그렇지만 분위기 좋은 곳을 알아왔다며괜찮냐고 했다.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하고 좋아서 나는 어디여도 장전된 총알처럼 바로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말한 곳은 내 단골집이었다.
나는 처음 가보는 곳처럼 졸래졸래 그를 따라갔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입구에서 내가 들어갈 때까지 문을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들어와앉기도 전에 의자를 빼주었다.
그런 호의가 계속됐다.
나는 공주님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겁도 많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낯도 가렸다.
아직 그는 내게 낯선 사람이었다.나는 앉을 때 의자 등받이에 최대한 등을 붙여 앉았다.
자연스레 그와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그와 나 사이, 거리를 무너뜨린 건 릴케의 시였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해서 속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티가 날만큼 얼어 있었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의자에 바짝 붙어 앉은 것도 있었다.
시원한 생맥주가 왔다.그가 내 잔을 먼저 채웠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얘진 채로 그의 잔을 채우다 콸콸 넘치게 따라버렸다. 순식간에 넘친 맥주가 식탁을 덮었다. 나는 더욱 당황하고 긴장이 되어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다.
"죄송해요."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맥주는 쏟아야 제 맛이죠. 하하."
그 말과 함께 아무렇지 않다는 듯신나게 맥주를 닦고 있었다. 배려심 많은 그의 행동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는 날 보고 자꾸 생글생글 웃었다. 웃는 모습이 맑은 사람이었다. 그가 점점 더 예뻐 보였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문이 10개가 있다면 9개가 이미 열려서 왔다고.
오 마이갓!
나는 분명 오늘 그와 처음 만났는데 벌써 내게 10개 중에 9개가 열렸다니. 내게 그런 이성이 나타났다는 게 환상같이 느껴졌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신기루 같았다.금방이라도 사라질 말,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람.
희대의 사기극처럼 느껴질 만큼 그는 내게 너무 젠틀하고 너무 완벽했다.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의 말과 행동, 더 나아가 이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가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되나 혼란스러운 그 순간 그가 정신을 차리게 해줬다.
내 앞에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뱉어내듯 릴케의 시를 읊은 것이다. 내가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인 걸 알고 내게 잘 보이기 위해 릴케의 시 한 편을 그대로 외워왔다고 했다. 아직 진도가 거기까지 나가지 않아 처음 듣는 시였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시보다 세찬 빗방울처럼 내 마음을 두드렸다.
나는 더 이상 그가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낯설어서 의자에 딱 붙어있던 등과 허리가 어느새 그가 있는 쪽으로 한껏 당겨져 있었다. 그와 하는 대화는 다 재미있었고, 유쾌했다. 그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상체를 당기고 집중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이 끝나고(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내게는 짧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가 날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우리 동네이기도 하고 그는 다시 한 시간 거리를 가야 했기에 한사코 거절을 했지만 그는 기어코 날 아파트 정문까지 데려다줬다.
나는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혹시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 느낀 건 아닌지 걱정할 새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넘어지지 않고 잘 들어갔는지 걱정이 돼서 혼이 났다며 다정히 내 안부를 물어봐줬다.
나는 그에게벌써 푹 빠져버렸다.
2009년 12월 23일. 그와의 첫 만남.
그가 내 인생에 나타나면서 내게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났다.
평생 한 번도 받기 힘든 큰 선물이 그날 내게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는 지금 내 곁에서 타닥타닥 거리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그리고 언제라도 내가 말을 걸면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내게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그와 똑 닮은 아이들이 자고 있다. 그는 내게 운명이었고,기적 같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