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보다 더 긴장한 지팡이
아장아장 걷는 세 살배기 아가의 걸음보다 느리고 훨씬 조심성 있고 신중한 걸음의 내딛음이다. 행여 중심을 잃게 될까 양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할머니보다 더 바짝 긴장을 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디디며 발을 옮기고 있다.
득! 스윽, 득! 스윽. 왼손이 나가면 왼발이, 오른손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발이 적당한 리듬을 타며 움직인다. 손과 발이 위아래서 엇박자가 되지 않게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간다.
초록으로 진하게 물이든 나뭇가지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간다. 할머니의 조그마한 체구는 제법 큰 나무그늘에 가려지더니 금세 아파트모퉁이 뒤로 서서히 숨어들었다.
앞으로 또 얼마쯤 시간이 흘러야 하얀 할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나무그늘 아래로 사라진 할머니를 생각하며 우두커니 있으려니 어제 오후 한바탕 무섭게 쏟아졌던 소나기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갑자기 혈뇨가 있어 큰아들한테 연락을 해 급히 병원에 나오셨노라고. 청력의 반도 남아있지 않은 팔순의 아버지는 고함을 치듯 큰 소리로 장황하게 설명을 하시느라 횡설수설하신다.
이미 깨져서 흐트러진 조각같이 낱장이 되어 들려오는 말들을 한 줄로 세워보려 기를 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이어 날아든 남동생의 문자로 조각난 말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명확해진다.
마음은 급한데 아직은 퇴근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큰딸에게 병원에 혼자 계신 아버지의 상황을 알린 후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딸은 당연한 일처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연히 가야지." 한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걸려온 딸의 전화는 "엄마! 비가 너무 많이 와.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아. 큰 도로에도 흙탕물이 가득 찼어. 아마 자동차 바퀴는 다 잠겼을 걸. 내 차는 바퀴도 작자나." 평소엔 대범해 보이던 딸도 처음 겪게 된 호우성폭우에 긴장한 목소리로 야단이다.
진료실에 아버지를 들여보내고 이어지는 여러 검사에 예상보다 지체되는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출근을 한다고. 우리 집 장남인 남동생은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는 나에게 문자로 아버지를 부탁했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