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1)

by 시나브로

따뜻한 커피를 들고 베란다로 가 앉았다. 차분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하고 갖가지 소음에 방치됐던 귀속을 잠잠하게 치유해 준다.


좌악좌악 주 욱 주 욱 세상을 덮어오는 아침 빗소리를 반기며 들었다. 오랜만에 다육에게도 쏟아지는 빗물에 등짝이 오싹하게 샤워하며 호사를 누릴 기회도 줬다. 시원스레 내리는 비를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덩달아 훤하게 밝아오는 아침도 함께 내려주기를 이제는 기다린다.


커피가 식어가기 전에 무작정 빨리 들이켜도 안 되는 아까운 그것을, 한 모금씩 숫자를 헤아리듯 날아오르는 향기를 음미하고 아껴가며 마시려 한다. 스스로 정해 놓은 하루의 양을 지키기 위해, 머그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눈여겨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내 주변을 맴돌며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잠을 불러들이려는 심술궂은 잠귀신을 냉정하게 쫓아내려 좋아하는 노래도 크게 틀어놓는다. 그때 허공을 날아 앞산으로 향하는 한 마리, 작은 새의 날갯짓이 반갑다.


베란다 난간에 방울방울 매달린 투명한 물방울의 모습도 선명하고 맑은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싱그럽게 보인다. 둥글둥글 조금씩 몸뚱이가 커지면 옆에 남겨진 제 동무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물방울들은 조심스레 몸을 날린다.


아마도 허공을 낙하하며 조각조각 조그마한 물방울로 쪼개어진 알갱이는 화단의 잡초들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을 것이다.


집 앞을 지키는 비에 젖은 키가 큰 참나무는 여느 때와 다르게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신중해 보이고 평소보다 더 어른스러운 듬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아직도 베란다에 남겨진 다육들은 해 바라기만 하더니 끝끝내 얼굴도 보이지 않는 태양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가 보았다. 이제는 시무룩하니 축 쳐진 잎사귀가 내 어깨를 대신하려는 듯하다.


다육이와 해 바라기 하는 일상이 몸에 배여 밝은 햇빛 없이 여러 날을 산다는 건 무척이나 버거워하는 우리니까. 잔잔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비는 어제도 오늘도 충분히 느끼고 감상하며 즐겼으니 이제는 웬만하면 우리의 로망인 밝은 태양이 얼굴을 보여준다면 좋겠네.


조금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앞산의 대나무도 평소에는 쏴아아 쏴아아 한 데 뭉쳐 시원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오늘은 침울한 표정으로 잔뜩 고갤 숙이고 있다.


매일같이 베란다에서 시간을 잊고 산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씩씩한 발걸음을 구경했던 내 눈은 비 내리는 이 날씨에도 행여 우산이라도 받쳐 쓰고 산으로 향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려나 산으로 오르는 언덕을, 작은 골목골목을 꿰뚫듯 헤맨다.


설마 길가로 향해 드리운 초록이 무성한 저 나뭇가지에 가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춰진 건 아닐까. 아까부터 외롭게 하늘을 배회하던 한 마리 하얀 작은 새는 잠깐 어디를 헤매다 돌아왔는지 여전히 하늘에 커다란 원을 둥글게 그리며 날고 있다.


친구들은 모두 다 어디로 떠나갔길래 웬만하면 저도 같이 따라갈 것을 왜 혼자서 저러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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