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1)

퇴근길

by 시나브로

갑자기 쏟아진 비에 옷을 적신 이는 없을까. 학생 적엔 손에 우산을 들고 도 따갑게 내리 쏟아붓는 비를 일부러 온몸으로 맞았던 기억이 있다.


퇴근길, 오늘은 문득 그날의 기억들이 정처 없이 떠올랐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철철 퍼붓는 비를 있는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향했던 날. 그렇게 용감했던 때가 분명 나에게도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지금의 나이엔 문득문득 어딘가로 너무 멀리 와버린 것만 같다. 덩그마니 외따로 떠나 와 이방인이 되어버린 느낌에 이유 없이 쓸쓸해질 때가 있다. 지금의 이 나이엔 왜 그리 조심할 것도 의식할 것도 많기만 한 건지...


지금에는 그런 용기인지 객기인지를 차마 흉내 낼 수 없는 건. 이미 건널 수 없는 불혹의 강을 지나와 피할 수 없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과 책임감, 그리고 조심할 것이 너무 많은 사회적인 통념과 시선들만이 나를 둘러싸고 갖가지 생각에 빠져 몸을 사리게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갈수록 많은 것들로부터 쉽게 회피할 수 없는 과중한 책임만이 따르는 것 같다. 그런 현실에서 차마 뒷걸음질조차도 칠 수 없게 한다. 어떻게 해도 외면하고 피할 수 없는 책임이란 것에 짓눌려 문득문득 두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퇴근길 오늘은 예상치 못했던 소나기를, 인정사정없이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차 안에서 우두커니 마주하게 됐다. 강한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고 저 혼자 깨지고 부서지고 도랑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시동만 걸어둔 채 넋을 놓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다봤다.


평소엔 멀쩡하게 켜 있던, 늘 혼자서도 씩씩하게 떠들어대던 라디오 소리마저 빗소리에 잠긴 건지. 하나둘 너울이 되어 밀려드는 추억들에 떠밀려 가버렸는지 내 귓전엔 숨을 죽인 채 조용하기만 했다.


거세게 다가와 우당탕탕 차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퍼붓는 소낙비처럼 허둥지둥 현실에 쫓기던 나를 보듯 시간을 잊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옛 기억들이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나를 붙들고 매달렸다.


지금에야 내차가 있어 갑작스러운 비를 맞을 일도, 급히 우산을 찾아 헤매야 할 일도 없는 예전에 비하면 너무나 호사스러운 생활이다. 소소한 것에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나에게 퇴근길, 오늘은 문득 어린 시절의 한 때가 거침없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와 나를 불러 세웠다.


빽빽하게 도로를 채운 수많은 자동차들에 섞여 빨간 신호 앞에 잠시 멈춰 선 차 안. 문득 이삼 분이 흘러가는 동안 저 혼자 바삐 움직이는 와이퍼를 보며 혼자서도 자꾸만 쓴웃음을 흘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입영전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