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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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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14. 2023

08. 덴마크 코펜하겐, 내 영혼의 스승 복월화 씨

복월화 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가르침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장기간 이어진 고행과 예상치 못한 봉변으로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주린 배를 움켜잡고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내가 누군지도 잊은 채 눈에 보이는 벤치에 주저앉아버렸다. 배낭을 벗어 옆에 두고 그 위에 쓰고 있던 갓끈을 풀어 올렸다. 두루마리 도포의 해진 소매 끝으로 양눈을 지그시 눌러 눈을 감았다. 아! 난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내리쬐는 햇살처럼 피할 수 없는 깊은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스물여섯, 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길을 잃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떠난 나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같은 숙소에서 머물던 여행객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코펜하겐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을 것이며 크리스티안 하운 지구를 얘기하며 히피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어울려 지내는 코펜하겐은 내가 하고 있는 freebow운동과 잘 맞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서유럽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둘러본 내가 왜 북유럽은 갈 생각을 못 하느냐는 질책 아닌 질책에 코펜하겐으로 목적지를 결정하게 했다. 물론 내 팔랑귀가 이때도 한몫했음은 당연하다. 


여행의 시작 전부터 북유럽 국가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익히 들었다. 게다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는 슈퍼마켓에서 금으로 된 물건을 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 잠깐 들렸다 freebow를 하고 그날 바로 다른 도시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서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매표소로 달려가서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매표소의 문이 굳게 닫혀, 셔터가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마음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니 글쎄, 금요일인 오늘이 쉬는 날이라고 하는 것이다. 표를 예매하려면 월요일 오전에 와야 된다는 내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전해왔다. 북유럽 복지 국가라고 하더니, 무슨 사정에서든 금요일 오전부터 버스매표소가 문을 닫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 여행객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문구다. 나 역시도 어디를 가든 이 말을 철칙으로 그 나라 문화를 존중하고 따른다. 그러나 구멍 난 주머니 사정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연자실하여 셔터문을 부여잡고 한참 동안을 서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나를 위해 다시 이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월요일을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반항 아닌 반항을 하고 싶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근처 슈퍼마켓에서 물 한 병을 샀다. 물 한 병에 4,000원이었다! 400원도 아닌, 4,000원. 나는 다시금 셔터로 달려가 지금이라도 한 번 흔들어 볼까 하는 유혹을 누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망연자실하여 버스 터미널을 나와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전날 밤 버스에서 하룻밤 잠을 잘 요량으로, 코펜하겐을 슬쩍 스쳐 지나갈 요량으로 왔으니, 다음 계획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꼼짝없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 빵 한 개 사 먹기도 부담스러운 도시인 이곳에 4일간 갇혀버린 것이다. 심신이 탈진하여 그저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존중의 freebow도 잊은 채, 그 전날까지도 다짐하고 다짐했던 아우슈비츠의 깨달음마저도 잠깐 접어놓은 채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구름을 부러워하면서.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한국말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백발이 잘 어울리는 노부인이 서 계셨다. 나이가 지긋한 외국여성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먼저 인사를 해 주신 것이 감사하여 서둘러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인사를 드리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해오셨다. 한국인이 맞는지, 여긴 어떻게 온 것인지, 이 옷차림은 무엇인지 등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에는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분께서는 메모지를 꺼내 자신의 집 주소를 적어서 내게 주었다. 지금은 자신이 손자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가야 해서 시간이 안 되니, 조금 후에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머뭇거리는 내 손에 그녀는 메모지를 꼭 쥐어주시고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 꼭 좀 와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당장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생겼다. 날 기다릴지도 모를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 노부인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일단은 그녀와 만난 후 freebow를 하던가, 잘 곳을 찾을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혹 그녀에게 여행팔이를 하며 빵 한 조각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삿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여행안내소에 들러 코펜하겐 지도를 얻고 그 지도에 노부인의 주소를 안내받았다. 주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멀어 보였다. 버스를 이용하면 금방이었겠지만 빵 한 개 사 먹을 돈도 부담스러운 내게 버스는 사치였다. 믿을 건 다리뿐,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지만 초행길에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고 그녀와 만난 지 1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려준 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고풍스러운 북유럽식 주택들이 즐비한 거리의 한 빌라였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없으니 일단 초인종을 눌러보고 잘못 찾아왔으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니라면 결국 그분과의 인연도 여기까지 일 터였다. 지친 마음에 현관문의 초인종부터 눌렀다. 그리고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코리안 가이? 코리안 한복?’ 머뭇거리던 찰나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을 눌렀다. 다행히 맞게 찾아왔다. 노부인께서 현관문을 활짝 열고 환한 미소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나를 맞이해 주었기 때문이다.

  

부인께서는 점심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같이 먹자며 나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겸양을 떨 처지가 아니었기에 염치 불고하고 덥석 앉았다. 그녀는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하셨지만 지금 뭘 먹느냐가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뭐라도 먹는 것이 중요했다. 몇 끼만에 제대로 먹는 음식이던가? 지성인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으로 그릇을 핥지는 않았다. 아마 부인께서 앞에 앉아서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시지 않았더라면 또 모를 일일테지만. 기분 좋은 포만감에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커피를 내주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본래의 덴마크 이름이 아닌 ‘복월화’로 소개했다. 그 이름은 한국의 성철스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했다. 성철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사진 속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그녀가 합장하며 서 있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국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도 신기했지만 성철스님과 인연이 있는 분이란 사실도 놀라웠다. 복월화 씨는 젊은 시절 불교를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는 한국외대에서 교수생활도 몇 년 하시면서 한국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맺어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서재에 꼽혀 있는 한국에 대한 여러 권의 서적이 그녀의 한국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했다. 


“성종, 성종은 여기에 왜 오게 되었나요?” 

나는 아까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존중하는 세상. 인류가 나아갈 길. 다음 세대를 위해 현세대가 만들어가야 할 인류보편적 가치 등과 내가 하고 있는 캠페인의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해 주며 동조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성종은 아직 왜 여기에 왔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군요.”

서로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얘기하면서 오해가 생긴 걸까. 그녀는 다시 설명할 채비를 하는 내게 손짓으로 만류하며 혹시 잘 곳을 구했는지 물었다. 이제 생각해봐야 한다는 내 대답에 그녀는 열쇠를 줬다. 남편은 몇 해 전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자식들은 다 출가하여 혼자 살고 있으니 여기서 편히 머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편하게 지내요. 대신 매일 아침은 같이 먹어야 해요. 그리고 방값은 아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에요. 시간은 충분하겠죠?” 


복월화 씨가 오늘 처음 본 날 뭘 믿고 열쇠를 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지행색과 다를 바 없었던 내가 복월화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귀중품을 뒤지거나, 금품을 요구하며 흉기로 위협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걸까. 또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우리 집 가훈처럼 과한 친절에는 이유가 있을 거란 의심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 왜 왔는지를 또 대답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녀가 듣고 싶은 얘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런 생각들과 궁금증으로 복잡한 머리와 달리 몸은 정직하고 솔직했다. 양손으로 곱게 열쇠를 받아 들어 깊숙이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이 캠페인을 하면서 가장 편안한 날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라니! 늘 시간에 쫓기듯 공용샤워실 또는 유료샤워실에서 후다닥 씻기 바빴던 나였다. 구석구석 지난밤의 번뇌를 씻어내고 나면 복월화 씨와 아침을 먹었다. 식사자리의 주요 주제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사람들과 freebow를 하러 이곳에 왔으니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오늘은 운하 근처에서 절을 할 거예요. 오늘은 궁전 근처에서 절을 할 거예요. 오늘은 인어동상 근처에서 절을 할 거예요.’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주섬주섬 두루마리를 입고 갓을 쓴 채 절을 하러 거리로 나섰다. 복월화 씨는 그런 나를 배웅하고 나면 집안 청소를 하고 손자를 데리러 가거나, 병원의 파트타임 잡을 하러 갔다.   


아침에 생각했던 장소로 가서 익숙한 몸놀림으로 절을 하기 위한 자리를 깔고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든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던 사람도 난생처음 보는 특이한 의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 녀석이 뭘 들고 있는 거지’라며 가까이 다가와 슬로건을 읽는다. 여기까지 오면 대략 성공이다. 다음 질문은 열에 아홉은 ‘그래서 절(bow)이 뭐야?’ 다. 나는 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먼저 시범을 보인다. 이미 천 번 넘게 한 행동이지만 처음 이 캠페인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집중한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너무 빨라서는 안 된다. 장난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절을 받는 사람이 당신에 대한 나의 존중이 느껴질 수 있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임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조심스럽게 맞절을 권한다. 해도 좋지만 안 해도 좋다. 그래도 그 마음 어딘가에 존중의 씨앗은 뿌려졌을 테니까. 기념 삼아 찍어간 사진을 보며 살면서 한 번쯤은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할 테니까. 


해가 떠 있는 낮 동안에는 종일 절을 한 후에 다시 복월화 씨의 집으로 향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복월화 씨와 저녁을 함께 했다. 식사자리의 주제는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무엇을 했는가?’였다. 그럼 나는 샤워 후 보송보송해진 몸과 복월화 씨가 차려준 푸짐한 밥에 들떠서 그날 일었던 이야기보따리를 신이 나서 풀었다. 오늘은 몇 명과 절을 했는지. 기억 남는 사람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오늘도 역시 힘들었지만 그래도 보람 있었다고. 대부분 말하는 사람은 나였지만 때때로 복월화 씨도 내 얘기에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거나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면서 복월화 씨에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었다. 


복월화 씨는 신경 쓰지 않는다. (I don’t care)는 말을 말버릇처럼 자주 했다. 그러나 그건 어떤 행위나 대상에 대한 무시나 방관, 체념이 아니라 평화와 안정, 그녀가 삶에서 얻은 깨달음의 그 무엇이었다. 이를 테면 자신이 현재 가진 이 좋은 집과 자산 등의 경제적 가치와 교수로서 가졌던 권위,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한 것보다 자신의 지혜의 획득, 마음의 평화를 쫓는 듯했다. 


특히 그녀는 나이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몇 살이냐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이나 사고가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슬퍼했다. 자신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 일뿐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나이에 신경 쓰지 않고 오전에는 봉사활동을, 오후에는 간단한 파트타임 잡을 하고 저녁에는 춤과 같은 새로운 취미를 배우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는 복월화 씨가 준비해 둔 방에 푹신한 이불을 덮고 앉거나 누워서 나는 명상이라 부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멍 때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기에 그녀가 만들어 준 고요함 속에서 그녀의 숙제에 대한 고민’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내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듯이 말한 것처럼 존중의 가치를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서로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축복으로 삼고 함께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가자는 freebow를 하기 위해서. 코펜하겐에 오게 된 건 단순한 변덕이었고 때마침 그 변덕을 맞춰줄 버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그녀가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닐 터였기에 고민은 깊어질 따름이었다.


일요일 저녁, 복월화 씨는 freebow를 마치고 온 나를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그녀 덕분에 나는 코펜하겐에서 버스라는 인류의 위대한 과학적 발명품을 다시금 경험했다. 이토록 안락하고 편한 이동수단을 만들어준 선조들께 감사를! 그녀는 감격한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데리고 한 호텔 앞에 내렸다. 그곳은 코펜하겐에 있는 5성급 호텔이었는데, 그녀가 낮 시간 동안 돌봐주는 손자의 어머니, 즉 그녀의 딸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호텔 로비를 지나 데스크에 있는 그녀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복월화 씨를 닮아 눈부신 미소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근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잠깐 시간을 내어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평생을 음악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이 호텔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신기한 듯 묻는 내게 그녀는 얘기했다.

“매 순간 내게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 했어요.”

“그런데 왜 음악이 아닌 호텔에서 일하게 되신 거예요?”

“그게 제 길이었으니까요.”

그녀는 역시 복월화 씨의 딸이었다. 선문답 같은 얘기에 이해 못 하는 내가 다른 질문을 했다. 복월화 씨가 내 준 숙제에 대해서 묻는 내게 그녀는 웃으며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그래서 답을 찾으셨어요?” 

“아니요. 첫날 그녀에게 해준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제 답변에 그녀가 실망할까 봐 걱정돼요.”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세요. 억지로 꾸며낼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정답인 거예요.”

복월화 씨 따님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복월화 씨와 코펜하겐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와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지난날과 같이 일어나 몸을 씻고 복월화 씨와 아침밥을 먹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은 무엇을 할지 얘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더 꼼꼼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보기에 불편한 곳은 없는지. 복월화 씨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으로 복월화 씨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렇게 떠날 채비를 모두 갖추고 복월화 씨와 마지막 대화를 시작했다. 


“복월화 씨.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베푼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따스한 봄바람이 지나가기에 잠깐 머물러가기 바라는 마음에 창문을 열어뒀던 거예요. 성종이 머무는 덕분에 내내 저는 봄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가실 건가요?” 

“네. 가야죠. 그리고 지난번 문제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복월화 씨, 저는 여기에 고통을 안고 왔습니다. 저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나에게만 삶이 이다지도 가혹한가. 그래서 이 고통을 덜기 위해서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제 고통의 이유를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버스에 몸을 싣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만나서 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안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세상에 대한 미움도, 제가 미워했던 사람들, 제가 미워했던 것들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저와 절을 하는 사람들 속에, 제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들 속에 신은, 선이라는 이름으로 깃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저의 깨달음을 전해준다고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복월화 씨는 가만히 나를 보며 말했다. 

“성종. 고통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고통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제 편하게 놔주세요. 당신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이랍니다.” 

그 말을 듣는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흐르는 눈물을 복월화 씨는 손을 들어 말없이 닦아주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얼핏 우연인 듯 보이는 것도 자세히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요. 삶에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당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세요. 그렇게 자신의 길을 깨달아 가세요.”

그런 그녀의 등뒤에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아껴 두었던 큰절을 올렸다. 복월화 씨가 추구하는 내적깨달음에 그녀가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서. 절을 하고 일어나는 시간은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걸 하는 나와 그 절을 받는 그녀에게는 또 영원과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처음 본 젊은이에게 잠잘 곳과 자신의 먹거리를 내어준 복월화 씨. 그녀가 내게 준 삶의 방식과 깨달음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부족하고 어리석은 성종은 여전히 고통을 완전히 놔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놓는 방법은 알게 됐다고.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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